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

정치
단체
1955년 5월 25일에 결성된 친북성향의 재일동포 단체.
이칭
이칭
조총련, 총련, 조선총련, 조련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1955년 5월 25일에 결성된 친북성향의 재일동포 단체.
개설

조총련·총련·조선총련(조련)으로 약칭한다. 조총련은 민단에 맞서 재일동포의 거주, 직업, 재산과 언론, 출판 등 권익 옹호와 자유를 옹호한다고 명시하는 자치단체임을 표방하고 있으나 실제는 친북적 성향의 조직이다. 따라서 북한의 전위대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조총련의 강령과 규약을 승인하는 재일동포에게는 누구나 가입이 개방되어 있다.

설립목적

1955년 5월 25일 조총련은 아사쿠사〔淺草〕공회당에서 정식으로 결성되었고, 이 결성대회에서는 재일동포의 북한 주위로의 결집, 조국의 평화통일, 재일동포의 민주적·민족적 권리 옹호, 민족교육 실시, 북일 친선과 세계평화에의 공헌 등이 강령으로 채택되었다. 결성 시에는 한덕수 등 6명의 의장단 집단지도체제가 만들어졌다. 8개조로 된 강령이 채택되었는데, 제1조는 “우리들은 모든 재일조선동포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정부의 주위에 총결집하여 조국남북 동포와의 연계와 단결을 긴밀하고 강고하게 한다”고 하였다. 이하의 7개의 조항은 이 제1조에 종속하는 조항으로 되어 있었다. 이 강령이 실제 효과를 발휘한 것은 1967년 5월의 조총련 제8회 대회까지였다. 당시 제8회 대회는 김일성 절대화의 수령론을 승인한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4기 제15차 전원 회의 결정에 기초한 대회였다.

연원 및 변천

1945년 이전부터 일본에 살았던 재일동포는 1945년 해방과 함께 전국적인 규모의 조직을 결성했다. 그것이 재일본조선인연맹(在日本朝鮮人聯盟 이하 조련)이다. 이 조련이 조총련의 내용적 전신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조련은 해방을 맞이하여 민족주의진영과 공산주의진영이 총결집하여 조직되었다. 1945년 이후 이 조직이 존재하는 동안 재일동포 사회의 대표기관이었다. 조련은 재일조선민주청년동맹, 재일조선민주여성동맹, 재일조선해방구원회, 재일조선유학생동맹 등을 산하 조직으로 두었다.

조련은 1949년 9월 관련 산하 조직인 민청 등 4개 단체와 함께 폭력 단체로 규정되어 해산명령을 받았다. 그리고 조직의 중요 간부들인 김천행·윤근·한덕수 등은 공직 추방을 당했다.

1950년 4월 조련이 해산된 다음에 조련의 계속 조직으로는 조선인단체협의회, 조국통일전선실행위원회 등이 존재했다. 이들 단체는 1951년 1월 9일재일조선민주전선(在日朝鮮民主戰線, 약칭 민전)을 결성했다. 조련의 행동조직이었던 민청의 후속 조직으로 조국방위위원회(祖國防衛委員會, 약칭 조방위)가 결성되었다.

조총련 결성의 직접 계기는 북한의 한덕수 지지가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재일동포를 “공화국의 해외공민으로 한다”는 북한 남일(南日) 외무장관의 성명과 이것의 연장선상의 한덕수(韓德銖)를 지지하는 성명이 나왔다. 그리고 민전 내부의 주류파와 민족파 사이의 투쟁이 종결된 것이다.

특히 민전 제19회 중앙위원회에서는 한덕수가 ‘재일조선인운동의 전환에 대해서’라는 제목으로 연설하여 “공화국 공민의 입장”에 선 “재일조선인운동의 방향과 투쟁 방법”을 분명히 했다. 5월에는 그러한 노선전환 주장이 대세를 이루었고, 24일 임시대회에서 민전의 발전적 해소 결의가 있게 된다. 이후인 1955년 5월 25일 민전과 조방위가 해산되고 한덕수가 중심이 되어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가 나타났던 것이다. 당시 일본공산당은 민대파의 해산과 ‘조선인’ 당원의 당적 이탈을 결정했다. 결국 재일동포운동은 4반세기 동안 그 기치 아래에서 투쟁해 온 일본공산당과 결별했고, “공화국의 해외공민”으로서 김일성과 조선노동당의 지도 아래 출발하게 되었다.

기능과 역할

1958년 5월 조총련 제4회 전체회의는 한덕수의 1인 의장체제로 이행한 대회였다. 이후 조총련도 활동가가 3명 이상 있는 각급 기관·직장·지역에 비공식의 중핵적 지도조직으로 ‘학습조’가 조직되었다. 이 학습조는 김일성 혁명사상의 조총련 내 침투와 민대파 추락에 따른 한덕수 지도체제 강화를 촉진하기 위한 수단이었다고 평가한다. 이 제4회 전체회의를 전후 북한의 교육 원조 지원 송금과 북한 귀환이 고양되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1959년부터 1984년까지 93,340명이 북한으로 갔다. 당시 재일동포의 귀환문제가 크게 부상하는 것은 형식적으로는 1958년으로 조총련 가와사키〔川崎〕지부 중유(中留)분회에 거주하는 재일동포가 집회를 열고 일본에서의 괴로운 생활을 청산해서 집단귀국 한다는 것을 결의하면서였다.

조총련에게 1960년대 초는 조직의 확립기였다. 거의 모든 일본의 도도부현(都道府縣)에 지방본부, 조청(朝淸) 등의 참가 단체, 조선신보사 등의 사업체가 조직에 들어갔다. 그리고 유치원에서 조선대학에 이르는 150개에 이르는 민족학교의 틀이 마련되었다. 그 결과 1960년대 초의 조총련 산하의 재일동포는 20만 명이 되었다.

1970년 전후 재일동포 사회는 급변한다. 조직적으로는 성장하여 재일동포 중 거의 절반 정도를 산하에 두었다. 그리고 김일성의 주체사상을 유일한 지도사상으로 하는 조직체제를 마련했다. 이 과정에서 김병식(金炳植)이 급부상하기도 했다. 그는 1972년 한덕수와 대립하여 실각했다. 이른바 ‘김병식사건’의 충격은 일부 간부나 일반 동포의 조직 이탈을 초래했다. 그리고 조총련의 조직이 하향곡선을 가게 되었다. 이와 함께 197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재일동포 성묘단의 한국, 즉 모국을 방문 사업이 추진되어 조총련의 구성원이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으로 전향하는 수가 증가했다.

1980년대에는 한덕수체제는 재건되었다. 이후에는 김정일의 지도가 조총련 조직 내부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김정일의 지도는 조총련을 급변하게 했다. 그 결과는 재정 담당 부의장이었던 허종만(許宗萬)이 1993년에는 책임부의장으로 승격되었다. 이것은 조총련 조직의 일인자가 된 것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아울러 1980년대 이후 한국의 경제 성장과 조총련계 상공인들에 대한 헌금 강요, ‘86년 서울아시안게임’과 ‘88년 서울올림픽’의 개최로 인해 그 세력이 약화되어 갔다.

실제로 조총련은 1990년대 이후 약화되어 갔다. 북한의 식량 위기와 탈북자 문제, 그리고 조긴(朝銀) 파산과 납치 문제 등이 이를 선도했다.

그런가 하면 북한의 영향을 절대적으로 받는 조총련은 1995년 강령이 대폭 개정되었다. 제1조 “애국애족의 기치 하에 주체의 위업 계승, 완성을 위해서 공헌할 것”이 공식적으로 명기되었다. 그리고 정세의 변화에 따라 2004년에 개정되었다.

조직을 장악했던 한덕수는 2001년 사망한다. 이후 조총련은 서만술(徐萬術)의장, 허종만 책임부의장 체제가 되었다. 2000년대 후반 조총련은 조직이 약화되어 약 4만 명으로 줄었다.

한편 조총련은 『조선신보』를 발행하고 있다. 월요일과 목요일을 제외하면 매일 발행되고 있는데, 조선신보사가 발행하고 있다.

현황

조총련은 중앙기구와 지방본부, 지부, 분회로 구성되어 있다. 중앙기구는 3년 마다 열리는 최고 의결기관인 전체회의, 전체회의가 열리지 않는 동안의 최고 의결기관인 중앙위원회, 중앙상임위원회로 구성되어 있다. 위원회에는 의장, 제1부의장, 책임부의장, 부의장 등이 있다. 의장은 모든 일을 주관한다.

조총련의 산하 단체로는 재일본조선인상공인동맹, 재일본조선인노동자동맹, 재일본조선인민주여성동맹 등을 비롯해 재일본조선인인권위원회, 재일본조선인평화통일위원회 등의 위원회가 존재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조총련은 조직의 비대화와 권위의 확립으로 관료적인 것이 되었다. 그리고 재일동포들의 환멸과 상공인에 대한 강제모금 등으로 조직이 극도로 약화되어 가고 있다. 폐쇄성, 독선이 조직을 동포가 이탈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현재 조총련은 구성원이 특별영주권자의 10%정도인 4만 명이 되었다. 북한의 해외 교포 조직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면서 재일동포 사회의 새로운 단체로 거듭나는 것이 조총련이 안고 있는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재일코리안사전』(정희선 외역, 선인, 2012)
『朝鮮總連』(朴斗鎭, 中央公論新社, 2008)
『총련』(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 조선신보사, 2005)
「재일동포가 걸어온 두 갈래 길, 민단과 조총련」(김인덕,『한일관계 2천년 보이는 역사, 보이지 않는 역사』, 경인문화사, 2006)
「조총련연구:역사와 성격을 중심으로」(진희관, 동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9)
『"i"ェ朝鮮總連"フ罪"ニ罰』(韓光熙, 文藝春秋, 2005)
『記録 在日朝鮮人運動朝鮮総 連50年』(呉 圭祥, 有限会 社RAS, 2005)
집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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