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년 10월 3일 일본 히비야〔日比谷〕공회당에서 218명의 대의원과 2,000명의 조선인이 참석한 가운데 재일본조선인거류민단(在日本朝鮮人居留民團)이 창립되었다. 이후 1948년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고 1949년 1월 주일한국대표부가 설치됨에 따라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在日本大韓民國居留民團, 이하 민단)이 되었다. 1994년 그 명칭에서 ‘거류’라는 두 글자가 빠져 ‘재일본대한민국민단(在日本大韓民國民團, 이하 민단)’으로 변경되었다. 2005년부터는 한국 국적으로 제한했던 단원을 한반도에 뿌리가 있는 모든 사람으로 확대했다.
박열(朴烈)을 단장으로 했던 재일본조선인거류민단은 1948년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고, 1949년 1월 주일한국대표부가 설치됨에 따라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즉 1948년 8월에 대한민국이 수립되자 이승만 정권은 이 조직을 재일코리안의 공인 단체로 인정했고 그에 따라 명칭도 ‘재일본조선인거류민단’에서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으로 변경되었다. 강령에는 “대한민국의 국시 준수”와 “재류동포의 권익 옹호” 그리고 “국제친선”이 들어갔다.
1945년 해방의 물결 속에서 재일동포는 8월 20일재일조선인대책위원회를 비롯하여 300여개의 민족운동단체들을 일본 전역에서 조직했다. 같은 해 9월 10일에는 도쿄〔東京〕의 7개 단체와 일본 각지에서 온 60명의 대표자들이 모여 재일조선인연맹 중앙위원회를 결성했다. 그리고 10월 15일 재일조선인의 전국대회를 통해 각지의 대표 5,000명이 참석한 가운데 재일본조선인연맹(在日本朝鮮人聯盟, 약칭 조련)이 결성되었다.
그런데 조련이 재일동포의 대동 단결을 목표로 했던 것과 달리 점차 북한을 지지하는 단체로 변하자 일부의 재일동포 청년들은 그해 11월 별도로 조선건국촉진청년동맹(朝鮮建國促進靑年同盟, 약칭 건청)을 결성했다. 이후 박열의 출옥과 함께 그를 중심으로 1946년 1월신조선건설동맹(新朝鮮建設同盟, 약칭 건동)이 조직되었다. 이 건청과 건동이 현 민단의 조직적 전신이었다. 건청과 건동은 1946년 10월 3일 히비야 공회당에서 재일본조선인거류민단을 결성했던 것이다. 초대 단장에 박열이 선출되었다.
1948년 8월 대한민국이 수립되자 이승만 정권은 이 조직을 재일동포의 공인 단체로 인정했다. 1949년 1월 주일한국대표부가 설치됨에 따라 그 명칭이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으로 고쳐졌다. 1994년 그 명칭이 ‘거류’라는 두 글자가 빠져 ‘재일본대한민국민단(이하 민단)’으로 변경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재일동포 사회의 민단계열은 1945년 해방 이후 삼의사유해봉환사업(三義士遺骸奉還事業)을 시작했다. 먼저 이봉창이 교수형을 당한 우라와〔浦和〕형무소 부속묘지에서 유해를 확인하여 접수하고, 이후 1946년 1월 유해를 모두 찾아 국내로 송환시켰다.
민단은 1950∼1960년대부터 지속적으로 대한민국의 각종 문제에 개입해 왔다. 1950년 한국전쟁에는 재일동포 지원병을 파견했고, 195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조총련의 북한 귀환운동에 대해서는 반대와 저지운동을 전개했다. 1959년 12월 14일 제1차 북송선이 북한으로 떠날 때에는 니이가다〔新潟〕역에서 민단 청년결사대가 항구로 통하는 철로를 차단하고 반대 시위를 전개했다.
또한 1964년의 도쿄 올림픽 때는 재일한국후원회를 통해 한국 선수단을 적극 지원했다. 1960년 4·19혁명과 5·16군사쿠데타에 대한 평가를 놓고 민단 내부는 대립했다.
1965년 한일조약이 체결되자 민단은 대한민국 정부와 유대가 보다 강화되었다. 특히 재일동포의 법적지위 협정에 따라 재일 동포의 영주권에 대한 법적 근거가 마련되어 민단의 양적 팽창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1970년대에 들어 ‘녹음테이프사건’을 계기로 민단 중앙파(중앙총본부)와 민주세력파 사이에 대립했다. 특히 박정희정권의 ‘유신체제’에 민단 중앙은 호응하여 집행부를 중앙집권적 조직 편성으로 개편하고 ‘10월 유신’에 맞춰 스스로를 ‘유신민단’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군사정권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결국 민단 내부에 균열이 생겨나 민단의 본국 추종 자세를 비판한 사람들과 한국청년동맹·한국학생동맹 등의 산하단체는 민단으로부터 제명 처분을 받기도 했다.
경제적으로는 대한민국의 경제발전을 위해 재일동포 경제인을 중심으로 ‘재일한국인투자협회’를 조직하여 신한은행 신설과 함께 금융면에서도 본국의 경제발전에 기여했다.
1975년부터 시작된 ‘모국방문사업’을 통해 45,000명에 달하는 조총련계 동포의 대한민국 방문을 실현시켰다.
1980년대 후반부터 민단은 한·일친선사업, 성묘단 모국방문사업을 비롯해 대한민국에서 진행되는 행사인 86아시안게임, 88올림픽과 무주동계유니버시아드 등을 후원하는 일에 적극 나섰다.
1996년 10월 3일 민단 창단 50주년을 기념하여 재일한국인은 일본 사회에서 정주해 나갈 것을 내외에 밝히고, 한국인으로서 일본지역 사회에서 공생과 공영을 위해 나갈 것을 다짐하기도 했다. 그리고 1997년 말 한국이 IMF위기에 처했을 때 이를 타개하는데 동참한다는 뜻에서 ‘외화송금운동’을 전개해서 약 870억 엔의 일화를 송금하기도 했다.
한편 민단은 재일동포의 권익 옹호에도 주목했다. 1965년 한일조약 체결과 함께는 법적 지위 요구 관철운동과 영주권 신청운동을 전개했다. 당시에는 문제점이 있었으나 ‘재일한국인 1세·2세의 협정영주권’의 획득·신청자의 확대가 있었다. 이 운동의 결과 재류 자격의 안정을 추구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1960년대 후반이 되면 조선국적에서 한국 국적으로 국적을 변경하는 재일동포가 급증하면서 조총련과 민단의 세력 관계가 역전되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1991년 1월 10일 재일한국인의 법적 지위에 관한 한일 외상 간의 합의를 통해 영주권 부여가 확정되었다, 이와 함께 지문날인 철폐 등에도 일정한 성과가 나타났다. 문제는 처우에서는 국적에 의한 취직 차별과 민족교육 문제, 참정권 문제 등이 있다.
한편 민단의 기관지는『민단신문』이다. 재일본대한민국민단의 기관지로서의 창간은 1946년 3월 10일이었다. 당시의 조선건국촉진청년동맹(건청)이 발행한『조선신문』에서 『신조선신문』(1946.8.30 창간∼1947.2)을 거쳐 민단 중앙 기관지 『민단신문』(1947.2.21 창간∼1949.6)이 되었다가 『민주신문』(1949.6.4 창간∼1962.1), 『한국신문』(1962.1.24 창간∼1996.4)으로 개칭되어, 지금의 『민단신문』(1996.5.1∼)에 이르고 있다. 최고 발행 부수는 10만 부이다.
중앙본부 아래 간토〔關東〕, 토호쿠〔東北〕, 추호쿠〔中北〕, 긴키〔近畿〕, 주고쿠〔中國〕, 규슈〔九州〕, 시코쿠〔四國〕지방협의회가 있고, 산하에 지방본부가 있다. 아울러 산하 단체로 재일본대한민국부인회, 재일한국상공회의소, 재일본대한민국청년회, 재일대한체육회, 재일학도의용군동지회, 재일본대한민국학생회, 재일한국과학기술협회가 있다. 교육기관으로 동경한국학교, 오사카백두학원, 오사카금강학원, 교토국제학원 등이 있다.
재일동포의 정주화가 진행됨에 따라 민단은 새로운 길을 모색해 가고 있다. 권익옹호운동은 공민권운동의 색채가 강해지고 있고, 지문날인 유보운동은 영주외국인 지문날인제도 폐지라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아울러 협정 3세 이후의 일본 영주를 허가한 ‘한일 각서’가 체결되기도 했다. 동시에 영주 외국인의 지방참정권을 요구하는 운동도 전개되었다.
특히 민단 내부의 재일동포 21세기위원회가 제안하여 일본 국적 재일동포를 정 단원으로 하는 민단 규약 개정, 재일코리안 역사교과서의 제작, 재일한인 역사자료관의 설립 등이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