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7년 신간회 본부가 결성되자 여성운동계 내부에서 여성운동의 통합운동이 일어나 근우회가 조직된 것처럼, 근우회 도쿄지회도 1928년 1월 21일 조직되었다.
근우회 도쿄지회의 창립대회는 도쿄대(東京大) 기독청년회관에서 1928년 1월 21일 열렸다. 이 자리에는 60여명의 회원과 백 여명의 방청객이 참가하여 박화성의 개회사로 시작되었다. 일본부인동맹, 신간회 동경지회의 축사가 있었고 격렬한 토론에 기초하여 다음과 같은 주요 내용을 결의했다. 1) 선언, 강령, 규칙, 2) 운동방침에 관한 건, 3) 부인운동에 관한 건, 4) 인신매매에 관한 건, 5) 신간회 지지에 관한 건, 6) 일본부인동맹과 제휴의 건, 7) 교양에 관한 건, 8) 대중신문 지지에 관한 건, 9) 회 유지 등에 대해 결의했다.
선출된 주요 역원은 위원장 박화성, 서무부 이완구, 선전조직부 양봉순, 정치문화부 강평국, 재무부 김분옥, 출판부 윤성상, 조사정보부 지경숙 등이었다. 이 근우회 도쿄지회는 신간회 도쿄지회가 쓰는 사무실인 도쓰카쵸(戶塚町) 199번지에 함께 쓰고 있었다. 따라서 절대 다수의 활동을 신간회 도쿄지회와 함께 했다.
근우회 정기 전국대회(1928일 5월 26, 27일 개최예정)를 둘러싸고 본부와 도쿄지회 간의 대립은 본격적으로 야기되었다. 근우회 도쿄지회가 발행한「근우회 전국대회 금지 폭거에 대하야 전조선피억압 민중에게 격함」(1928. 5. 20)은 5월 26, 27일을 기해 개최 예정이었던 근우회 전국대회를 5월 11일자로 종로서가 금지를 명령했다고 한다. 이유는 의안과 대회에 참석하는 인물이 불온하다는 것이었다.
결국 일제의 집회 금지에 대해 근우회 본부는 의안 토의를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임시 전국대회를 7월 14일 개최하기로 했다. 이렇게 되자 근우회 도쿄지회는 신간회 도쿄지회와 연명으로 「근우회 임시 전국대회에 제(際)하야 우리는 이러케 성명한다-특히 대회 대의원 제군에게 격(檄)함-」는 문건에서 지난 5월 제2회 전국대회가 금지되었는데, 이것은 근우회에 국한된 탄압이 아니기 때문에 탄압 국면에 대항해 정치적 해금의 일시적 국면에서 대회를 지켜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도쿄지회의 성명서에 대해 근우회 본부는 7월 12일 집행위원회를 열어 내부에서 논의를 하고 본부를 무시한 행동이라고 하여 도쿄 지회를 무기정권 처분시켰다. 이러한 상태에서 근우회 도쿄 지회는 7월 14, 15일 임시 전국대회가 열리자 정권 상태로 출석했다.
도쿄(東京)에 조직적 기반을 둔 도쿄 지회는 집행부 조직을 통해 조직 사업을 전개했다. 제3회 집행위원회는 1929년 3월 12일부터 18일까지 선전데이를 정하고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도쿄지회의 활동 가운데 선전, 선동활동으로는 1928년 3월 18일부터 전개된 여성문제 대강연회가 있다. 이 모임은 재일조선인 대중단체의 적극적인 지지와 찬조에 의해 전개되었다. 이 자리에는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 신간회 도쿄지회, 도쿄조선노동조합, 학우회, 프로예술동맹 도쿄지회, 신흥과학연구회, 재일본조선청년동맹, 삼총해금동맹 등의 찬조 연설이 있었다.
근우회 도쿄지회는 1929년 이후에는 실제 활동의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신간회 도쿄지회의 자연 해산과 함께 조선 내 근우회의 해체를 기다리지 않고 일본 각지의 지회와 함께 해산했다. 근우회의 이밖의 일본지역 조직은 교토(京都)와 오사카(大阪)에 지회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