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정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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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주요감시대상 인물카드 허정숙 전후면
일제 주요감시대상 인물카드 허정숙 전후면
정치
인물
일제강점기 때, 근우회 중앙집행위원, 조선혁명군정학교 교육과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해방 이후 북한에서, 북조선인민위원회 선전부장, 조선민주여성동맹 중앙위원회 서기장 등을 역임한 관료 · 독립운동가.
이칭
이칭
허정자(許貞子)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여성
출생 연도
1902년(고종 39)
사망 연도
1991년
출생지
함경북도 명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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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일제강점기 때, 근우회 중앙집행위원, 조선혁명군정학교 교육과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해방 이후 북한에서, 북조선인민위원회 선전부장, 조선민주여성동맹 중앙위원회 서기장 등을 역임한 관료 · 독립운동가.
내용

함경북도 명천 출신으로 본명은 허정자(許貞子), 이명은 허정숙(許貞琡)·수가이(秀嘉伊) 이다.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로 활동한 허헌(許憲)의 큰딸로, 배화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고베〔神戶〕신학교에서 수학하고, 1921년 경 중국 상해에서 유학했다.

귀국 후 조선여성동우회 결성에 참여하고 집행위원이 되었다. 그해 11월 수가이(秀嘉伊)라는 필명으로 『동아일보』에 「여성해방은 경제적 독립이 근본」이라는 글을 발표했다.

1925년 아버지 허헌을 따라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가 1927년 귀국하고, 1928년 7월 신간회의 자매단체 근우회(槿友會) 전형위원 및 중앙집행위원에 선임되었다.

1929년 12월 광주학생운동이 서울로까지 확대되자, 근우회 서무부장으로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의 학생시위에 관여하였다가 체포되어 징역 1년을 받고 1932년 출옥했다. 1936년 남편 최창익(崔昌益)과 중국으로 망명하였고 조선민족혁명당에 입당했다.

1938년 민족혁명당을 탈당하고 조선청년전위동맹 결성에 참여했다. 10월 일본군에 우한〔武漢〕이 함락되자 중국공산당 근거지인 연안(延安)으로 들어갔다. 1940년 항일군정대학 정치군사과를 졸업했고, 1941년 팔로군(八路軍) 제120사 정치지도원으로 활동하였다. 이어 1942년 조선혁명군정학교 교육과장 및 독립동맹 집행위원을 지냈다.

해방 직후인 1945년 12월 경 귀국하고 평양으로 월북하여 북한정부에 참여하였다. 1947년 북조선인민위원회 선전부장, 1948년 북한 문화선전상을 지내고, 한국전쟁 이후에는 1957년 사법상, 1959년 최고재판소장, 1972년 최고인민회의 부의장, 조선민주여성동맹 중앙위원회 서기장, 1983년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비서 등 당·정부·입법부 및 통일단체·여성단체의 요직을 거쳤다.

참고문헌

『한국사회주의운동인명사전』 (강만길·성대경, 창작과 비평사, 1996)
「나의 아버지 허헌과 언니 허정숙」 (허근욱, 『역사비평』28,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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