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약수 ()

일제 주요감시대상 인물카드 김약수 전후면
일제 주요감시대상 인물카드 김약수 전후면
정치
인물
일제강점기 조선노동공제회, 조선노동총동맹 창설에 참여한 노동운동가. 정치인.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90년(고종 27)
사망 연도
1964년
출생지
부산 동래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김약수는 일제강점기 조선노동공제회, 조선노동총동맹 창설에 참여한 노동운동가, 정치인이다. 1890년 부산 출생으로 일제강점기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이다. 1920년 한국 최초의 노동운동단체인 조선노동공제회, 이후 건설사(建設社)와 조선청년총동맹의 창설에 참여하였다. 1925년 제1차 조선공산당을 조직하여 국제공산당의 승인을 받았으나 이듬해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광복 후 좌익노선에서 이탈해 중간파 노선을 취했으며, 정부 수립 후 제헌의원과 초대 국회부의장을 지냈다. 1949년 국회프락치사건에 연루되어 수감되었다가, 6·25전쟁으로 출옥하여 월북하였다.

정의
일제강점기 조선노동공제회, 조선노동총동맹 창설에 참여한 노동운동가. 정치인.
개설

일제강점기의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이며, 정부 수립 후 제헌의원과 초대 국회부의장을 지냈다. 국회 프락치 사건에 연루되어 수감되었다가, 6 · 25전쟁으로 출옥하여 월북했다.

생애 및 활동사항

부산 동래 출생. 두전(枓全) 또는 두희(枓熙)라는 별명을 쓰기도 하였다. 서울의 휘문의숙과 경성공업학교를 졸업하였고, 1918년에 국내에서 활동하기 위해 김원봉(金元鳳) · 이여성(李如星) 등과 함께 만주 · 상해를 거쳐 난징[南京]에서 진링대학[金陵大學]에 입학하였다. 3 · 1운동의 소식이 중국에 전해지자 김원봉과 헤어져 이여성과 함께 귀국하였다.

1920년 9월에는 박중화(朴重華) · 박이규(朴珥圭) 등과 우리나라 최초의 노동운동단체인 조선노동공제회(朝鮮勞動共濟會)를 창설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그 뒤 일본으로 건너가 니혼대학[日本大學] 사회과에 적을 두고 1921년 11월 무정부주의자 박열(朴烈) · 장상중(張祥重)과 함께 흑도회(黑濤會)를 결성하였으나, 사상적 대립으로 따로 북성회(北星會)를 조직하여 기관지 『척후대』 · 『대중시보』 등을 발간하는 한편, 조선고학생동우회에도 관계하다가 1922년 귀국하였다.

귀국 즉시 이헌(李憲) · 김종범(金鍾範) · 마명(馬鳴) 등 북성회 멤버들과 함께 1923년 10월 서울에서 건설사(建設社)를 조직하여 국내 사회주의운동의 한 분파를 이루게 되었다. 1923년에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국내에 잠입한 정재달(鄭在達)과 접촉하여 구금되었다. 1924년 4월에는 김사국(金思國) · 신백우(申伯雨) · 이영(李英) · 정백(鄭栢) 등과 조선노동총동맹(朝鮮勞動總同盟) 및 조선청년총동맹의 창설에 참여하였고 1924년 11월 건설사를 북풍회로 확대 발전시켰다. 1925년 조동우(趙東祐) · 정운해(鄭雲海) · 김종범 · 신철(辛鐵) 등과 제1차 조선공산당을 조직하여 국제공산당의 승인을 받았으나 1926년 체포되어 1931년까지 복역하였다. 만주사변이 발생하자 『대중(大衆)』이라는 잡지를 발행하였으나, 구금과 탄압으로 폐간하고, 친일단체인 임전보국단(臨戰報國團)에 불응하여 여러 번 구금당하였으며, 좌익계의 모사(謀士)라는 평을 듣는 가운데 일제시대에 총 9년 7개월간 복역하였다.

광복 후 좌익노선에서 이탈하여 북한 정권 수립에 반대하는 한국민주당의 조직부장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1946년 5월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 무기휴회로 들어가는 상황에서 한국민주당이 좌우합작위원회의 토지정책을 반대하는 보수적 성향을 보이자, 1946년 10월 탈당하여 김규식(金奎植)을 총재로 한 민중동맹(民衆同盟)의 창설에 참여하여 상임위원직을 맡음으로써 중간파노선을 취하였다.

같은 해 12월에는 남조선 과도입법의원의 관선의원으로 지명되었다. 1947년 5월에는 나승규(羅承奎) 등과 분쟁이 생겨 민중동맹에서 탈퇴, 조선공화당을 창당하고 서기장에 취임하였다. 1948년 5 · 10총선거 때 경상남도 동래선거구에서 출마하여 제헌의원에 당선, 초대 국회 부의장에 선출되었다. 국회에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등 소장파 의원의 지도적 구실을 하다가, 1949년 6월 남로당 국회 프락치 사건에 연루되어 복역하던 중 6 · 25전쟁이 일어나자 출옥하여 월북하였다.

1955년에는 북한의 인민경제대학 특설반에 입교하였고, 1956년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상무위원 겸 집행위원을 역임하였으나 1959년 반당반혁명분자로 숙청되어 평안북도 벽지로 추방되었다.

참고문헌

『한국사회주의운동인명사전』(강만길·성대경, 창작과비평사, 1996)
『한국현대정치사』1(송남헌, 성문각, 1980)
『한국공산주의운동사』2(김준엽·김창순,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1970)
「김약수 선생 회담기」(백민편집부, 『백민』5, 1949)
「62기 중 안재홍 이광수 김효석 조헌영...등 좌우 인사 39명 묘소 최초 공개」(『민족21』38호, 2004)
대한민국헌정회(www.rokps.or.kr)
국사편찬위원회 한국근현대인물자료(www.history.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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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김남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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