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노동공제회는 1920년 4월 서울에서 조직된 노동운동단체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전국적인 노동운동단체로 조선노동연구회를 중심으로 결성되었다. 지식층에 의한 계몽주의 또는 노사 협조적 성격의 6개 강령을 채택하여 개량주의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대구지회를 시작으로 전국 각지에 지회가 결성되어 1922년에는 전국에 회원 15,000명에 이르렀다. 노동자의 이익단체로 결성되었지만 농민의 소작쟁의 등 농민운동을 지원하고 소작인조합을 결성하였다. 1924년에 조선노동연맹회·노동대회 등 모든 노동단체와 함께 조선노농총동맹에 통폐합되었다.
① 조선 노동사회의 지식 계발, ② 저축의 장려, ③ 품성의 향상, ④ 위생 사상의 향상, ⑤ 환난 구제(患難救濟) 및 직업의 소개, ⑥ 일반 노동 상황의 조사 등 6개항을 강령으로 채택하였는데, 지식층에 의한 계몽주의 또는 노사 협조적 성격이 두드러졌다.
중앙기구는 회장 박중화, 총간사 박이규, 이사장 오상근 및 박이규 · 박돈서 · 차금봉 · 신백우 등 25명의 집행위원, 장덕수 · 김명식 · 오상근 등 17명의 평의원으로 조직되었다. 지방조직도 같은 해 5월 27일 대구지회 발기를 시작으로 평양 · 안악 · 개성 · 인천 · 강화 · 예산 · 정읍 · 황주 · 북청 · 군산 · 신천 · 안주 · 광주(光州) · 영흥 · 신창 · 안동 · 경주 · 함흥 · 해주 · 청진 · 원산 · 진주 · 공주 · 영주 · 고산 · 하동 · 진영 · 강계 · 삼진(창원군)에 지회가 결성되어 1922년에는 전국의 회원이 1만 5000명을 헤아릴 정도로 큰 단체가 되었다. 그러나 결성 초기부터 노사협조단체라느니 또는 개량주의적이라는 등의 비판을 받았다.
1920년 회장 박중화가 일제 경찰에 붙잡힌 뒤 총간사 박이규가 그 자리를 대신하다가 1921년 제2회 대회에서 회장제를 없애고 집행위원제로 변경하였다. 이때 사회주의 계열 인사가 집행위원으로 많이 선출되었다. 1922년 4월 제3회 대회에서는 장덕수 등의 개량주의 계열이 크게 쇠퇴하고 윤덕병(尹德炳) · 차금봉 등 사회주의 계열이 더욱 부상하였는데, 이 무렵부터 공제회의 개량주의 성격에 대한 비판이 사회주의자들에 의하여 고조되었다. 그런데 당시의 사회주의 계열에서도 윤덕병과 차금봉이 대립하고 있어, 공제회는 결국 3파에 의한 조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윤덕병 계열이 1922년 10월 15일 서울 인사동 회관에서 조선노동공제회 해산대회를 가진 뒤 각 지방의 노동단체를 독립시킨 다음, 그것을 연맹 형식으로 재조직하여 조선노동연맹회를 결성하여 분립하였다. 이에 차금봉 계열도 10월 20일 나머지 노동단체를 규합하여 조선노동공제회를 존속시키기 위해 체제 정비에 힘을 쏟았으나, 조선노동연맹회의 우세한 조직에 밀려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이후 윤덕병 계열 쪽 북성회(北星會)와 차금봉 계열 쪽 서울청년회가 각각 노동운동을 장악하려고 치열한 분파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때 장덕수 계열도 이 단체에서 이탈해 갔다. 이러한 사태는 1922년부터 한국에서 사회주의 운동이 고조된 데 따른 민족주의 · 사회주의 · 사회개량주의 등의 사상적 대립과 연결된 것이고, 또 사회주의 내의 분파 작용에 의한 현상이었다.
1920년 8월부터 서울의 인사동 · 동숭동 · 숭사동 등에 노동야학을 설치해 운영하였다. 이 노동야학은 1907년 마산에서 처음으로 설립되어 발달해 온 것으로, 1920년대 전국적으로 파급되었다. 기관지로 『공제(共濟)』를 간행하였다. 1920년 9월에 창간호, 10월에 제2호를 발행하였는데, 편집진이 일본 경찰에 붙잡히고 제3호부터 제6호까지 원고도 압수당해 발행이 중단되었다. 이듬해인 1921년 4월 제7호, 이어 제8호가 속간되었으나 제9호부터 다시 원고가 검열을 통과하지 못해 발행되지 못하였다. 『노동공제회보(勞動共濟會報)』도 발행했으나 1920년 8월 제1호를 간행한 뒤 중단되었으며 이듬해 6월 속간되었다. 1921년 7월 15일부터 서울 관수동에 한국 최초의 소비조합상점을 설치해 노동자들에게 식량과 일용필수품을 공급하며 일제 식민경제의 수탈에 항거하였다.
노동자의 이익단체로서 결성되었지만 이 무렵 전국으로 퍼져 가고 있던 농민의 소작쟁의에도 관심을 보여 농민운동을 지원할 체제도 갖추기 시작하였다. 즉, 1922년 4월 제3회 대회에서 소작인조합의 결성을 결의하고, 이어 같은 해 7월에는 ‘소작인은 단결하라’라는 장문의 선언문을 발표해 농민들을 지원하였다. 이러한 농민운동에 대한 관심은 농민운동을 지원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노동 · 농민단체로 발전해 가는 실마리가 되었다. 조선노동연맹회 · 노동대회 등 모든 노동단체와 함께 1924년 4월에 조직된 조선노농총동맹에 통폐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