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덕병(尹德炳)은 서울 출신으로, 서당에서 한문을 수학하였다. 1910년 서울 양정의숙(養正義塾) 법률과를 졸업하였다.
1920년 2월 조선노동문제연구회 제1차 토의에 발기인으로 참가하였고, 그해 4월 조직된 조선노동공제회 창립대회에서 서무부 간사로 선임되었다. 1921년 5월 김사국(金思國) · 김약수(金若水) · 김한(金翰) · 신백우(申伯雨) · 이영(李英) 등과 비밀결사 ‘ 조선공산당(중립당)’에 참가하였다. 1922년 3월 중립당 구성원들과 사상운동 단체 무산자동맹회(無産者同盟會)를 결성하였다. 그해 10월 조선노동연맹회(朝鮮勞動聯盟會) 결성에 참여하였다.
1923년 5월 노동사(勞動社)를 조직하고, 『노동자』를 발행하였다. 그해 6월 김약수 · 김재봉(金在鳳) · 김찬(金燦) · 신백우 · 이봉수(李鳳洙) 등 서울파를 제외한 화요파와 북풍파를 중심으로 코르뷰로 국내부를 조직하였다. 같은 해 7월에는 원우관(元友觀) · 김찬 등과 함께 사상운동 단체인 신사상연구회(新思想硏究會) 결성하였다. 이때 고무직공 동맹파업이 일어나자 '고무여직공 동맹파업 전말서'를 작성하여 전국 노동운동 단체에 배포하였다. 이로 인해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11월 경성복심법원에서 「출판법」 위반이라는 죄목으로 벌금형을 받았다.
1924년 4월 조선노농총동맹 결성에 참여하여 중앙상무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25년 2월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 준비위원(경성 대표)으로 선임되었다. 그해 4월 조선공산당 결성에 조선노농총동맹 대표로 참여하여 중앙검사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제1차 조선공산당 검거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수감되었으며, 1929년 8월 출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