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수(金台洙)는 1904년 충청북도 영동 출생으로, 영동보통학교 졸업 후 서울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중퇴하였다.
학업을 중단하고 영동으로 내려와 용화면(龍華面) 영신학술강습회를 운영하였다. 이후 영동면 계산(稽山)학원 교사와 신문기자를 역임하였다. 1926년 5월 영동 지역 사회운동을 지도할 목적으로 장준(張埈) 등과 사상운동 단체인 칠월회(七月會)를 조직하고 집행위원이 되었다. 같은 달 결성된 영동노동청년회의 집행위원이 되었다. 그해 10월 영동청년연맹의 결성에도 참여하였다.
1927년 8월 제3차 조선공산당 탄압 사건과 관련하여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가 다음 해 6월 경성복심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고 출옥하였다.
1929년 2월 영동청년동맹을 조직하고 집행위원장이 되었다. 1930년 1월 신간회(新幹會) 영동지회 설립 촉성위원으로, 그해 10월에는 영동소비조합 경리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같은 해 11월 개최된 조선청년총동맹 전설대회(傳說大會)에서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31년 3월 적우동맹(赤友同盟)을 결성하고 책임비서로 활동하였다. 그해 6월 영동농민조합을 혁명적 농민조합으로 전환할 목적으로, 구성원들에게 「조선의 혁명적 노동자 제군에게 격함」이란 격문을 배포하였다. 1932년 2월 일본 경찰에게 검거되어 1934년 7월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 형을 선고받았다.
8 · 15광복 후 영동 지역의 대표적인 활동가로, 1945년 11월 전국인민위원회 대표자대회에 영동 대표로 참석하였다. 그해 12월 전국농민조합총연맹의 결성대회에 충북도연맹 대표로 참석하였다. 1946년 2월 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대회에서는 중앙위원으로 선임되었다. 그해 3월 민주주의민족전선 충북지부 조직부장이 되었다. 6 · 25전쟁 당시에는 영동군 인민위원회 위원장이었다.
2006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