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윤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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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사
인물
일제강점기 만주 사회주의운동을 통일하기 위해 활동한 사회주의운동가.
이칭
이명
박윤서(朴允瑞), 박윤서(朴潤瑞), 박위세(朴衛世), 박강격(朴姜激), 간체르, 박호림(朴虎林)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95년(고종 32)
사망 연도
미상
출생지
소련 연해주
주요 경력
고려공산청년회 만주총국 책임비서|조선공산당 만주총국 군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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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박윤세는 만주에서 사회주의운동 통일을 위해 활동한 사회주의운동가이다. 분열된 만주의 조선인 사회주의운동을 통일할 목적으로 고려공산청년회 만주총국을 조직하고 책임비서가 되었다.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중국공산당 등에서 활동하였다.

정의
일제강점기 만주 사회주의운동을 통일하기 위해 활동한 사회주의운동가.
인적 사항

박윤세(朴允瑞)는 1895년 소련 연해주에서 황해도 송화 출신의 이주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박윤서(朴允瑞) · 박윤서(朴潤瑞) · 박위세(朴衛世) · 박강격(朴姜激) · 박호림(朴虎林) · 간체르 등이다.

주요 활동

1922년 10월 러시아공산당에 입당하였으며, 그해 말 코르뷰로에 의해 간도로 파견되었다. 1923년 5월 용정에서 주청송(朱靑松), 이기석(李基石) 등 동흥중학(東興中學) 학생들을 지도하여 고려공산청년회 간도 용정 야체이카를 조직하였다. 또한, 합법 조직으로 사회과학연구회와 친목회를 조직하여 사회주의사상을 전파하였다.

1924년 12월 25일 분열된 만주의 조선인 사회주의운동을 통일할 목적으로 고려공산청년회 만주총국을 조직하여 책임비서가 되었다. 만주 조선인 사회주의운동의 통일적 기관을 자임하였지만, 이러한 행동을 새로운 종파 구성으로 평가한 러시아공산청년동맹으로부터 한사빈(韓士斌), 강진(姜進) 등 14명과 함께 제명되었다.

1926년 10월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이 결성되자 가입하여 군사부장으로 활동하였다. 1927년 10월 제1차 간도공산당사건이 일어나자 소련 블라디보스토크로 탈출하여 망명자위원회 지도부를 결성하였다. 1928년 1월 ML파의 조선공산당 및 고려공산청년회 만주총국 재건을 주도하였다. 1929년 7월에는 만주총국 군사부 책임자가 되었다.

1930년 3월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고, 소수민족운동위원회 책임자로 활동하였다. 그해 4월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의 지시로 문갑송(文甲松)과 함께 동만주로 파견되어 전동만폭동위원회 등을 조직하였다. 같은 해 8월 연변 제1차 당원대표회의에서 중국공산당 연화중심현위원회 군사부장에 선임되었고, 9월에는 중국공산당 연길구 군사위원회 서기가 되었다. 12월에는 모험주의적 과오를 범했다는 이유로 중국공산당에서 제명되었다가 남만에서 다시 입당하여 유격대 결성에 참여하였다.

1933년 3월 지린〔吉林〕 일본 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었고, 1935년 9월 만주 관동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았다.

참고문헌

단행본

강만길·성대경 편, 『한국사회주의운동인명사전』(창작과비평사, 1996)

논문

박종린, 「1920년대 ‘통일’ 조선공산당의 결성과정」(『한국사연구』 102,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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