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조선공산당에서 파견된 전권위원인 조봉암(曺奉岩)과 최원택(崔元澤), 김동명(金東明)은 1926년 5월 소련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온 김철훈(金哲勳), 윤자영(尹滋瑛), 김하구(金河球) 등과 함께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을 결성하고, 본부를 영안현 영고탑에 두었다. 지도부에 비서부·조직부·선전부를 두고, 초대 책임비서에 조봉암, 조직부장에 최원택, 선전부장에 윤자영이 임명되었다. 김동명은 당의 외곽 조직인 고려공산청년회(高麗共産靑年會) 만주총국의 초대 책임자로 선출되었다.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은 북만주·남만주·동만주에 각각 산하 조직을 두었으며, 조선인이 가장 많이 밀집해 살고 있던 동만주를 활동의 중심지로 삼았다.
1926년 6·10만세 사건을 계기로 제2차 조선공산당이 와해되고 재건된 당 중앙은 화요파 대신 ML파가 장악하였다. 만주총국 내에서도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에서 두 정파가 각각 주도권을 잡고 서로 경쟁하고 대립하였다. 1927년 10월 제1차 간도공산당탄압사건이 일어나 만주총국이 와해되었다. 이후 화요파와 ML파는 북만주와 남만주에서 각각 만주총국을 결성하고 경쟁하였다. 1929년부터 1국1당원칙(一國一黨原則)에 따라 중국과 일본에 거주하는 조선인 사회주의자는 각각 중국공산당과 일본공산당에 입당해야 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1930년대 들어 중국공산당에 개별적으로 입당해야 한다는 지침이 확고하게 정착하면서 ML파는 3월에, 화요파는 6월에 만주총국을 스스로 해체하였다.
만주총국은 다른 공산당 조직처럼 당원을 훈련하고 각지의 청년·여성·소년 단체를 지도하였다. 방학 중에 강연대를 조직하거나 야학을 개설하는 등 계몽·선전 활동에 나서기도 하였다. 민족주의자처럼 만주의 군사적 가치에 주목하고 중국 본토에서의 국민혁명에 호응하는 전략을 세우기 위해 군사 운동 방안을 연구하고 준비하려 하였다. 국내의 신간회에 호응하는 기구로 민족유일당을 결성하려는 운동이 중국에서 벌어지자 여기에도 적극 참가하였다. 1930년 들어서는 노동자와 농민의 이해를 적극 대변한다는 취지에서 간도 5·30봉기에 참여하는 등 좌경적인 대중운동에 적극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