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준(馬駿)은 함경북도 길주 출신으로, 마진(馬晉)의 아들이다. 이명은 마준(馬俊), 마문현(馬文賢), 마철(馬哲)이다. 1905년 부모를 따라 북간도 허룽현〔和龍縣〕으로 이주하였고, 용정(龍井)의 명동학교(明東學校)를 졸업하였다. 1923년 블라디보스토크 체류 중 사회주의사상을 수용하였다.
1927년 3월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였고, 그해 10월 옌지현〔延吉縣〕 옹성랍자(甕聲磖子)에서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동만구역국 제13 야체이카 소속원으로 활동하였다. 같은 달 발생한 제1차 간도공산당사건을 피한 후, 1928년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동만도(東滿道) 조직부장으로 활동하였다.
1930년 4월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의 지시로 박윤세(朴允世)와 함께 동만주로 파견되어, 전동만폭동위원회 등을 조직하였다. 그해 5월 중국공산당 연변특별지부를 도와 ‘간도 5 · 30봉기’를 지휘하였다. 같은 해 6월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8월에는 옌볜〔延邊〕 제1차 당원대표대회에 참석하여 중국공산당 연화중심현위원회(延和中心縣委員會)를 결성하고 조직부장이 되었다. 11월에는 중국공산당 동만특별위원회 위원 겸 연화중심현위원회 서기가 되었다.
1930년 12월 용정에서 간도총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로 압송되었다.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변절하였다. 출옥 후 고향에서 농업에 종사하였다. 1943년 조양천(朝陽川)에서 만주국 헌병대 분재소 특수사업반 반장과 헌병대의 특무로 활동하였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하자 연변인민민주대동맹(延邊人民民主大同盟)에 참가하였지만, 10월 친일 혐의로 자발적 무장대인 별동대에 체포되어 처형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