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하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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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사
인물
일제강점기 『한인신보』 주필, 고려공산당 중앙위원,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위원으로 활동한 사회주의운동가.
이칭
이명
김하구(金河龜)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80년(고종 17)
사망 연도
미상
출생지
함경북도 명천
주요 경력
대한제국 궁내부 주사|한인신보 주필|고려공산당 중앙위원
내용 요약

김하구는 일제강점기에 『한인신보』 주필, 고려공산당 중앙위원,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위원으로 활동한 사회주의운동가이다. 한북학회, 신민회 등 계몽운동 단체에서 활동하였다. 『권업신문』을 발행하고, 『한인신보』와 『선봉』의 주필을 지냈다. 한인사회당, 고려공산당 중앙위원을 역임하였다. 조선공산당 만주총국과 상해파의 조선공산당 재건운동 조직인 조선공산당재건설준비위원회에 참여하였다.

정의
일제강점기 『한인신보』 주필, 고려공산당 중앙위원,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위원으로 활동한 사회주의운동가.
인적 사항

김하구(金河球)는 함경북도 명천 출신으로, 어려서 한학을 수학하였다. 1910년 일본 와세다대학〔早稲田大学〕에 유학하였다.

주요 활동

1906년 함경도 출신 인사들이 조직한 계몽운동 단체인 한북학회가 조직되자 참여하였다. 1907년에는 신민회에서 참가하여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대한제국 시기 궁내부(宮內府)의 주사로 근무하였다.

1912년 4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신채호(申采浩)와 함께 권업회의 기관지인 『 권업신문(勸業新聞)』을 발행하였다. 1917년 7월에는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新韓村)에서 창간된 한글 신문 『 한인신보(韓人新報)』의 주필로 활동하였다. 또한 독일 스파이 혐의로 케렌스키(Aleksandr Fyodorovich Kerenskii) 임시정부에 체포된 이동휘(李東輝)의 석방운동을 주도하였다.

1918년 1월 러시아 귀화 한인 중심의 단체인 고려족중앙총회와 볼셰비키 지지 성향의 노령한인회가 연합하여 결성한 전로한족총회(全露韓族總會)에 참가하였다. 같은 해 5월 하바롭스크에서 개최된 한인사회당 창립대회에 연해주 대표로 참석하였다. 그해 6월에는 니콜리스크에서 개최된 전로한족총회 헌장기초회의에서 볼셰비키와 연대할 것을 주장하였다.

1919년 4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린 한인사회당 제2차 대회에 참석하여, 조선의 독립과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프롤레타리아 정권 수립, 주1 파견 대표의 소환, 독립전쟁론 등을 결의하였다. 1919년 하반기 상하이로 가서 이동휘 등과 함께 망명 한인들 사이에서 한인사회당의 위상을 높이기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해 11월 폐간된 『한인신보』를 복간하였고, 장도정(張道政)이 조직한 일세당(一世黨)과 연계하여 한인사회당의 조직 확대에 힘썼다.

1920년 4월 일본군이 연해주를 점령하자 신한촌을 떠나 상하이로 갔다. 1921년 5월 상하이에서 한인사회당 제3차 대회를 개최하고, 그 당을 고려공산당으로 개조하였다. 이때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해 11월 만주의 대표적 무장 독립운동 단체인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를 고려공산당에 합류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 결과 구춘선(具春先) · 강구우(姜九禹) 등이 합류하였다. 만주 지린성〔吉林省〕 돈화현(敦化縣)에 고려공산당 돈화군위원회를 건립하였다. 그 후 라오허〔饒河〕에서 고려공산당 조직을 건립하였다.

1922년 10월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과 상하이파 고려공산당의 통합을 위해 울란우데〔베르흐네우딘스크〕에서 개최된 고려공산당 연합대회에 참석하였다. 1923년 1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선봉』의 주필이 되었다. 1926년 5월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결성에 참여하였고,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해 10월 만주 고려공산청년회와의 통합에 반대하였다. 그러나 만주총국을 주도하던 화요회가 이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자 문제 제기를 하고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을 탈퇴하였다.

1927년 용정에서 상하이파의 비밀단체인 재만공산주의자동맹을 조직하였다. 그해 10월 제1차 주2 탄압 사건으로 조선공산당 만주총국과 동만도(東滿道) 조직이 파괴되자, 주하현 하동에서 개최된 조선공산당 조직 재정비를 위한 회의에 참석하였다. 이후 옌지현〔延吉縣〕 명월구(明月溝)에서 주건(朱健) 등과 함께 상하이파를 조선공산당에 입당하게 하여 당의 지도권을 장악하는 문제 등을 토의하였다.

1928년 12월 코민테른 정치서기국이 ‘12월 주3’를 발표하자,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상하이파를 중심으로 조선공산당 재건 문제를 논의하였다. 1929년 3월 지린성에서 조선공산당재건설준비위원회의 발기회가 조직되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상하이파의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지원하였다.

참고문헌

단행본

임경석, 『한국사회주의의 기원』(역사비평사, 2003)
강만길·성대경, 『한국사회주의운동인명사전』(창작과비평사, 1996)
주석
주1

1919년에 제일 차 세계 대전의 종결을 위하여 승전국들이 파리에서 개최한 강화 회의. 미국ㆍ영국ㆍ프랑스의 3국이 주도권을 장악하고 독일과 베르사유 조약을, 오스트리아와 생제르맹 조약을, 불가리아와 뇌이 조약을, 헝가리와 트리아농 조약을, 터키와 세브르 조약을 체결하였다.    우리말샘

주2

1927년에서 1930년까지 4차에 걸쳐, 일제가 만주에서 활동하던 조선인 공산주의 운동가들을 검거한 사건. 제1 차는 1927년 10월에 조선 공산당 만주 총국이 서울에서 진행 중이던 조선 공산당 공판의 공개를 요구하는 시위를 계획하다가 검거된 사건이다. 제2 차는 1928년 9월에 고려 공산 청년회 만주 총국 동만도 간부 등이 국제 청년일 기념집회를 계획하다가 발생하였다. 제3 차는 1930년 3월에 3ㆍ1 운동 11주년을 맞아 대대적인 무장봉기를 계획하다가 발생하였다. 제4 차는 1930년 5월 30일에 동만주 일대에서 발생하였다.    우리말샘

주3

1928년 12월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정치서기국이 채택한 조선공산당 재조직에 관한 결정서이다. 약칭으로 '12월 테제'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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