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춘(李成春)·왕성민(王成民)이란 가명을 사용할 때도 있었다. 함경남도 북청군에서 태어나 어려서 동만주 지방으로 이주하였다.
1913년 연길현(延吉縣) 숭신향(崇信鄕) 장흥동(張興洞)에 있는 흥동학교(興東學校)에서 교사로 재직하며 철혈광복단(鐵血光復團)에 참가하였다. 1919년 3월 13일 용정(龍井)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동만주 지방의 대표적인 무장단체였던 대한국민회 무장부대인 대한국민회군의 간부로 활동, 1920년 6월 봉오동(鳳梧洞)전투, 10월 청산리(靑山里)전투에 참전하였다. 이를 보복하기 위해 출동한 조선군 제19사단의 ‘간도출병’을 피해 소련 영내로 퇴각하였다.
1921년 6월 자유시사변을 겪은 후 연해주로 이동하였다. 1921년 10월 서간도군비단과 대한국민회군이 대한의용군사회로 통합될 때 간부로 선출되었다. 그후 소련의 시베리아 내전에 참가해 백위군(白衛軍)과 싸웠다.
1923년 1월 해삼위 신한촌 백산학교에서 46명의 청년들이 모여 적기단(赤旗團)을 결성할 때 여기에 참가하고, 북만주 지방에서 활동하였다.
1923년 8월 연길현 옹성랍자(甕聲磖子)에서 상해 콤그룹의 만주 지역 지도조직인 고려공산당 만주지방위원회를 결성하고 책임비서가 되었다. 1924년 8월 용정(龍井)의 영신중학(永新中學) 교사로 재직하며 사회주의사상을 선전하였다.
1926년 5월에 결성된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에 입당, 한때 동만구역국 옹성랍자 야체이카의 책임자로 활동했으나, 만주고려공산청년회와의 합동 문제 등으로 만주총국 내 화요회 그룹과 갈등이 일어나는 등 불협화음이 계속되었다.
이에 따라 상해 콤그룹원들이 만주총국을 이탈, 1927년 용정에서 만주공산주의자동맹을 결성하였다. 주건은 이 때 책임자가 되었다.
1928년 12월 코민테른 정치서기국의 특별 결정에 의해 조선공산당의 지부승인이 취소되었다. 이에 상해 콤그룹은 서울 콤그룹의 구파와 연합, 1929년 3월 조선공산당재건설준비위원회 주비회, 곧 재건그룹을 결성하였다. 주건은 1929년 9월에 재건설그룹의 만주부를 결성하고 책임비서가 되었다.
하지만 만주에서의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은 ‘1국 1당 원칙’에 위배되는 것이었다. 이에 중국공산당 등의 강한 비판에 직면한 재건설그룹은 내부에서 만주에 거주하는 사람은 중국공산당에 입당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모두 국내에 들어가 활동하자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1930년 6월 만주부는 중국공산당에 입당하기로 결정되었는데, 주건은 이보다 앞선 4월에 중국공산당에 입당, 중국공산당 연변(延邊)특별지부 집행위원이 되었다.
그리고 5·1투쟁행동위원회에 참가해 동만주 지방에서 반제반봉건운동을 지도하며, 그 최고의 절정에 이르렀던 1930년 5월 30, 31일에 일어난 ‘간도 5·30봉기’를 지도하였다. 그 해 10월부터 중국공산당 동만특별위원회 위원 겸 선전부장으로 1931년 9월까지 활동하였다.
1930년 가을경 동만특별위원회 산하 조선국내공작위원회가 결성되자 위원에 임명되어, 과거 재건설 그룹이나 이 그룹이 1931년 3월 이름을 바꾼 조선좌익노동조합전국평의회 조직준비회를 통해 국내에서 전개되고 있던 조선공산당 재건운동과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을 지원하였다.
1931년 3월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 산하의 한족(韓族)위원회 위원도 겸직하였다.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난 후에는 항일유격대를 세우는 데 힘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