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7년 러시아혁명 이후 러시아와 중국 지역에서 활동하던 저명한 민족운동가들은 1918년 2월[서력(西曆) 3월] 하바롭스크에서 '조선인정치망명자회의(朝鮮人政治亡命者會議)'를 개최하였다. 대회에서 "볼셰비키 주의에 찬동하여 고려혁명을 그 길로 촉진시키자."는 이동휘의 제안에 지지하였던 이들은 이후 한인사회당을 발기하여 1918년 4월 28일[서력 5월 11일] 최초의 한인 사회주의정당인 한인사회당을 창립하였다.
한인사회당은 중앙위원회 내에 조직부, 선전부, 군사부 3개 집행부를 두었다. 중앙위원으로는 위원장에 이동휘, 부위원장 오 바실리, 군사부장 유동열(柳東說), 조직부장 이한영(李翰榮), 선전부장 김립(金立) 등이 선임되었다.
보문사(普文社)라는 출판사를 두고 한글로 된 맑스주의 출판물을 간행하고, 기관지로 『자유종(自由鐘)』을 발간하였다. 한인 학생들에게 민족교육을 하기 위해 문덕중학교(文德中學校)를 설립하였다.
군사부 산하에 사관학교를 설립하고, 이를 기반으로 100여 명으로 이루어진 '한인사회당 적위군(赤衛軍)'을 조직하였다. 유동열과 전일(全一)이 지도한 '한인사회당 적위군'은 칼미코프 장군의 백군(白軍)이 하바롭스크를 공격해오자 이에 맞서 크라스나야 레츠카 전투와 하바롭스크 시가지 전투에서 치열한 전투를 치렀다. 그러나 결국 패배하고 하바롭스크가 점령당하자 한인사회당 성원들은 각지로 뿔뿔이 흩어졌다.
1919년 4월 25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제2차 당대회를 개최하고 신민단(新民團)과 통합하였다. 곧 조직될 국제공산당[코민테른(Comintern)]에 가입하기로 결의하고 박진순(朴鎭淳), 이한영, 박애(朴愛)를 대표자로 선정하여 모스크바로 파견하였다.
1920년 코민테른 제2차 대회에 참석한 박진순은 한인사회당을 코민테른 지부로 승인받고,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3 · 1운동 이후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와 상하이 임시정부가 통합하여 '통합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고, 이동휘가 국무총리로 선임되자 본부를 상하이로 옮겼다. 이어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20년을 '독립전쟁의 원년'으로 선포하였다.
1920년 5월 러시아 외무인민위원부 극동전권위원 빌렌스키가 상하이로 파견한 김만겸(金萬謙)과 함께 재상해(在上海) 한인공산당(韓人共産黨)을 결성하였다. 여기에는 상하이의 저명한 민족운동가들인 여운형(呂運亨), 안병찬(安秉瓚), 조동호(趙東祜) 등도 가담하였다.
1920년 말 이동휘는 무장투쟁을 위해 상하이 임시정부를 독립운동의 최고지도기관으로 전면적으로 개편하자는 방안을 내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국무총리직을 사직하고 상하이 임시정부를 탈퇴하였다. 이후 박진순과 한형권(韓馨權)이 확보해 온 모스크바 자금을 기반으로 조선 내지와 러시아, 중국을 아우르는 전한(全韓) 공산당의 조직에 힘썼다.
러시아 이르쿠츠크의 한인 공산주의자들과 통합 노력이 실패로 돌아가고, 1921년 5월 4일 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이르쿠츠크파]이 창립되었다. 이에 대항하여 5월 20일 상하이에서 한인사회당 제3차 당대회를 개최하고, 당을 고려공산당[상해파]으로 개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