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경북도 경흥 출신.
1911년 노령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상설(李相卨)·김학만(金學萬)·정재관(鄭在寬) 등과 권업회(勸業會)를 창설하는 데 참여하였다. 신문부 총무를 역임하였다.
1918년 5월 하바로프스크에서 조직된 한인사회당에서 당수인 이동휘(李東輝)의 막료로, 또 박진순(朴鎭淳)과 더불어 당내 이론가로서 활동하였다.
한인사회당이 1919년 말 상해(上海)의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할 때, 그 이론적 기반을 마련하여 한인사회당의 임시정부 참여에 깊이 관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20년 초에는 임시정부 국무총리 이동휘에 의하여 임시정부의 신임장과 밀서를 가지고 모스크바에 파견되어 소비에트정부의 외무상인 치체린(Tschitscherin, O.)을 만나고 레닌(Lenin, N.)과도 만났다. 레닌에게 ‘임시정부를 승인할 것’, ‘독립운동자금을 원조해 줄 것’ 등을 요구하였고, 레닌으로부터 200만루불의 지원을 약속받았다.
이 중 1차로 60만 루불을 받아 40만 루불을 김립(金立)을 통하여 임시정부에 전달하게 하였으며, 1922년 11월 20만 루불을 가지고 상해로 귀환하였다. 이 자금의 일부가 1923년 초부터 개최된 국민대표회의에 쓰였다.
그는 국민대표회의에서 창조파의 일원이었으며, 국민대표회의가 결렬된 뒤 창조파가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하여 조선공화국을 조직하였을 때, 국민위원회 위원을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