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경북도 부령 출생. 1919년 3·1운동 당시 청진부(淸津府) 신암동(新岩洞)·포항동(浦項洞)에서 시위운동을 주도하였다.
부령군 청암면(靑岩面) 자작동(自作洞)에 거주하고 있던 장두량은 월산에서 가져온 독립선언서를 열람하고, 또 서울 및 각 지방에서 시위운동이 일어난 소식을 듣고서, 방낙선(方洛先) 등과 거사를 모의하였다.
청암면사무소의 등사판을 가져와 독립선언서 1,000 여매를 인쇄하여 배포하고, 또 무명으로 태극기를 제작하여, 3월 31일 신암동에서, 4월 1일에는 포항동에서 시위운동을 일으켰다. 이후 만주로 망명하여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에 참여하였다.
화룡현(和龍縣) 사백사(四白社) 및 합화사(合化社) 지방을 근거로 한 대한국민회의 남지방회(南地方會)에 소속되어, 경호대원 겸 모연대원(募捐隊員)으로 활약하였다.
1920년 3월 이래 함경도의 회령(會寧)·부령·무산(茂山) 등지에 들어와 장정 및 군자금을 모집하였으며, 2,000여 원의 군자금을 모집해서는 칠도구(七道溝) 등지에 대한국민회지회를 설치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활동 중 이동백(李東伯) 등 동지 7명과 함께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경성형무소에서 10년 4개월간 복역하였다.
1994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