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한은 일제강점기 신한독립당 대표,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총무처장 대리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1900년(고종 37)에 태어나 1993년에 사망했다. 1919년 3·1운동 이후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단과 배달청년회 등에 참여하였다. 1930년 한국독립당 창당에 참여하였고 한국독립군으로 활약하였다. 중국의 구국군 등과 연합하여 대일항전을 전개하다가 김구의 제안으로 중국 관내로 이동하여 낙양군관학교에서 군사간부를 양성하였다. 한국독립당과 한국혁명당을 합당하여 신한독립당을 창당하는 등 정당단체의 통합운동에 주력하였다.
본관은 옥천(玉川). 이명은 안훈(安勳). 호는 백강(白岡). 전라남도 순천 출생이다. 아버지는 조정순이고, 어머니는 고령신씨이다.
1919년 3·1운동 후 만주로 망명, 광복을 맞을 때까지 만주와 중국관에서 활동하였다. 망명 직후 만주에서 독립단(獨立團) · 배달청년회(倍達靑年會) 등에 참여하였다.
1930년 7월 북만주에서 한족자치연합회(한족총연합회의 후신) · 생육사(生育社) · 동빈현주민회(東賓縣住民會) 등의 민족주의 단체들이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창당할 때, 홍진(洪震) · 지청천 등과 함께 창당에 직접 참여했으며, 동당의 선전부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31년 9월 일제가 만주를 참략하자, 그 해 11월 한국독립당 당군(黨軍) 한국독립군의 일원으로서 참전하였다. 그리고 중국의 구국군(救國軍) 및 오의성(吳義成) · 시세영(柴世榮) 부대 등과 연합해 대일항전을 전개하였다.
1933년 말 한국독립군이 중국의 오의성부대에 포위되어 무장해제당하는 사건이 일어나면서 이들과의 연합작전은 중단되었다. 이 무렵 난징[南京]에 있던 김구(金九)에게서 함께 일하자는 제의가 있자 지청천 등과 중국 관내지역으로 이동하였다.
1934년 2월 김구의 주선으로 낙양군관학교가 개교하였을 때 오광선(吳光鮮) · 이범석(李範奭) 등과 교관을 맡았다. 낙양군관학교에서 군사간부를 양성하는 한편, 1934년 3월 만주에서 이동해 온 한국독립당과 난징의 한국혁명당(韓國革命黨)의 합당을 추진, 신한독립당(新韓獨立黨)을 창당하였다.
그리고 윤기섭(尹琦燮) · 지청천과 함께 신한독립당 대표로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韓國對日戰線統一同盟)에 참여해 각 정당단체의 통합운동에 주력하였다. 그 결과 1935년 7월, 5개 정당 · 단체가 통일을 이룬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이 결성되었다.
민족혁명당에서 김원봉(金元鳳)과 마찰을 빚게 되었고, 1937년 4월에는 지청천 · 최동오(崔東旿) 등과 함께 민족혁명당을 탈당해 만주에서 활동하던 세력들을 중심으로 새로이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을 창당하였다.
중일전쟁 발발 직후인 1937년 8월 민족주의 진영의 정당 · 단체들이 연합해 결성한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韓國光復運動團體聯合會)에서 선전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임시정부가 치장[綦江]에서 조직과 체제를 정비하던 1939년 10월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되었고, 1944년까지 의정원 의원으로 활약하였다.
1940년 5월 충칭[重慶]에서 민족주의 계열 3당이 통합해 창당한 한국독립당에 참여했으며, 중앙상무집행위원 겸 훈련부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1940년 9월 임시정부에서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을 창설할 때 총사령부의 주계장(主計長)에 임명되었으며, 같은 해 11월 충칭에 있던 총사령부를 전방지역인 산시성[陝西省]시안[西安]에 설치하면서 총사령부 총무처장 대리를 맡았다.
일본군 점령지역에서 초모해온 한인청년들을 교육 · 훈련시키기 위해 설치한 한국청년훈련반(韓國靑年訓練班)에서 황학수(黃學秀) · 조시원(趙時元) 등과 교관으로 활동하였다. 1943년 3월 국무위원회 비서장에 임명되었다.
1944년 4월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을 개선할 때, 국무위원으로 선임되었고 8·15광복 때까지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63년 6대 국회의원, 1981년 독립유공자협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서훈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