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남도 진만포 출신으로, 이명은 노원일(盧元一)이다.
중국으로 망명해 광동성 광주(廣州)에 있는 중앙육군군관학교 광동분교(廣東分校)에서 군사훈련을 받고, 1936년 보병과 12기생으로 졸업하였다.
이후 중국군 장교가 되어 중앙유격간부훈련단에서 복무하였다. 1939년 2월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가 유주(柳州)에서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韓國光復陣線靑年工作隊)를 결성하였을 때, 그 대원이 되었다.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는 중국 관내에서 활동하던 한국국민당·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이 중심이 되어 임시정부를 옹호하려는 목적으로 결성한 연합체였고,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는 그것의 무장조직으로 결성된 것이었다. 이를 계기로 임시정부에 참여하였고, 이후 임시정부에서 활동하였다.
1939년 11월 임시정부 군무부로부터 군사특파단(軍事特派團)의 청년공작원으로 임명되어, 섬서성(陝西省) 서안(西安)으로 파견되었다. 군사특파단은 임시정부가 기강(綦江)에 도착한 후 한국광복군 창설을 추진하면서, 한인들이 많이 이주해 있는 화북(華北) 지역을 대상으로 병력을 모집하기 위해 파견한 것이었다.
단장 조성환(曺成煥)을 비롯하여 황학수(黃學秀)·나태섭(羅泰燮)·이준식(李俊植) 등과 서안에 거점을 마련하고, 화북지역의 한인청년들을 대상으로 선전 및 초모활동을 전개하였다. 광복군을 조직하기 위한 준비작업을 추진한 것이다.
1940년 9월 17일 중경(重慶)에서 광복군이 창설되면서 총사령부 부관에 임명되었다. 광복군은 창설 직후인 11월에 총사령부를 서안으로 옮기고 단위부대로 4개 지대(支隊)를 편성하였다. 이미 군사특파단으로 파견되어 서안에서 활동하고 있던 노복선은 제1지대의 간부로 활동하였다.
이 때 편성된 지대는 지대장과 10여 명의 간부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자체적으로 병력을 모집하여 병력을 증강해야 했다. 1941년 3월 대원들과 함께 산서성(山西省) 대동(大同)으로 가서, 그곳에 거점을 마련하고 병력을 초모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1942년 7월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가 광복군에 편입해 오면서 광복군의 단위부대도 새롭게 편제되었다. 기존의 제1·2·5지대를 통합하여 새로이 제2지대를 편성하였다. 지대장으로 참모장 이범석(李範奭)이 부임하였다.
이 때 제2지대 제3구대장에 임명되어 해방 때까지 서안에 근거를 둔 광복군 제2지대에서 활동하였다. 해방 후 귀국하여 대한민국 국군에 입대하여 육군 연대장을 역임하고, 1954년 전역하였다. 1977년 노환으로 작고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