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연천 출신. 이명은 반성무(潘誠武). 임시정부 외무총장 조소앙(趙素昻)의 세 번째 아들로, 조부모를 모시고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1930년에 결성된 한국독립당에 참여하였다. 그 뒤 김구가 중국측의 협조를 얻어 한인청년들에게 군사 훈련을 시키기 위해 낙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에 한인특별반을 설치하자 1934년 2월 이에 입교해 군사 훈련을 받았다. 이때부터 반성무라는 중국식 이름을 사용했다.
그리고 광동성(廣東省) 광주(廣州)에 있는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광동분교에 입교해 10기생으로 졸업했고, 중국군으로 복무하였다. 낙양(洛陽) 근처의 중국군 제45사단 참모처에서 근무하던 중, 삼촌 조시원(趙時元)으로부터 임시정부에서 광복군을 창설하니 이에 참여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정식으로 절차를 밟아 중국군을 제대한 후 1940년 서안(西安)에서 활동중인 군사특파단(軍事特派團)에 합류하였다. 군사특파단은 1939년 11월 임시정부가 광복군을 창설하기 위한 준비작업으로 화북(華北)지역에 이주해 온 한인 청년들을 모집하기 위해 파견한 것이었다. 이에 참여해 군사특파단원들과 함께 산서성(山西省)의 태원(太原)·임분(臨汾) 등지의 주요 도시로 나가, 그곳에 거주하는 한인청년들을 대상으로 모집 활동을 전개하였다.
1940년 9월 17일 중경(重慶)에서 한국광복군이 창설되면서 부관(副官)에 임명되었다. 1940년 11월 광복군총사령부가 서안으로 이전한 후 단위부대로 지대(支隊)를 편성할 때, 제1지대에 편성되어 간부로 활동하였다.
제1지대는 지대장과 10여명의 간부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은 군사특파단과 마찬가지로 산서성의 주요 도시에 거주하는 한인청년들을 대상으로 모집 활동을 전개하는 임무를 부여받고, 초창기 광복군의 병력을 모집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1942년 10월에 총사령부로 복귀하였다. 중국군사위원회가 한국광복군행동9개준승(韓國光復軍行動9個準繩)을 근거로 광복군을 통제하면서 총사령부의 직제를 개편함과 아울러 서안에 있던 총사령부를 중경으로 다시 이전토록 하였다.
이 때 총사령부 서무과에 발령을 받았고, 이후 인사과장 등을 역임하면서 총사령부에서 근무하였다. 1944년에 총사령부에서 관할하고 있던 토교대(土橋隊)의 부대장으로 임명되었다. 토교대는 임시정부를 찾아 온 한인청년들을 임시로 수용하던 일종의 보충대로 중경 남쪽에 있었다. 송호성(宋虎聲) 대장과 함께 이들에 대한 교육과 훈련을 실시하였다.
1945년에는 중국군사위원회에서 설치한 간부훈련반을 졸업했고, 광복군 참령(參領)으로 진급하였다. 해방 후 귀국해 주로 광복회(光復會)에서 활동하였다. 1997년 교통사고로 작고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