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양군관학교는 1933년 중국 허난성[河南省] 낙양에 설립되었던 국민정부 군관학교이다. 1932년 한인애국단원 윤봉길의 홍커우공원 투탄의거가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장개석과 김구는 낙양군관학교 내에 한인훈련반이 설치하기로 합의하였다. 중국 여러 지역에서 모집한 한국인 99명이 입학하여 육군군관훈련반 제17대를 편성하였다. 중국식 훈련이 아니라 한국인 교관이 학생의 정치·군사훈련을 담당하였다. 일본 영사의 해산 요구로 1935년 1기생 65명을 배출하고 문을 닫았다. 졸업생은 비밀결사를 조직하는 등 항일무장투쟁에 앞장선 독립군 지도자로 성장하였다.
1932년 일본의 괴뢰정부인 만주국정부가 성립되었을 당시, 상하이에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 김구(金九)가 이끄는 한인애국단 단원 윤봉길(尹奉吉)의 훙커우공원 의거가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중화민국 총통 장개석(蔣介石)은 한국인의 독립 투쟁 역량을 새롭게 인식하고 김구에게 면회를 요청하였다. 윤봉길 의거 후 은신하고 있던 김구는 1933년 5월 안공근(安恭根)과 엄항섭(嚴恒燮)을 대동하고 난징[南京]으로 가서 중앙군관학교 구내에 있는 장개석을 방문하였다. 이때 김구와 장개석은 낙양군관학교 내에 한인훈련반(이칭: 한인특별반)을 설치하기로 합의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광복군의 중추 장교를 육성할 책임자로 동삼성에 있던 한국독립군총사령 지청천(池靑天)을 정하고 그에게 4천원을 보내며 즉시 산하이관[山海關]으로 입관(入關)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상하이 · 난징 · 북경 · 톈진 등 여러 지역에서 모집한 한국인 청년 99명이 입학해 국민정부군관학교 낙양분교 육군군관훈련반 제17대(隊)로 편성되었다. 이를 보통반이라고도 한다. 지청천 외에 김구와 김원봉(金元鳳)이 경영에 참여하였으며, 대장은 이범석(李範奭), 교관은 오광선(吳光鮮) · 조경한(趙擎韓) · 윤경천(尹敬天) 등이었다.
중국 측에서 한국인 청년들을 중국 학생으로 취급해 학비 · 식대 일체를 지급하였다. 그런데 중국 측에서는 정훈과 교련도 중국식으로 실시하려 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측에서는 이를 반대, 경비와 교사(校舍)만 제공해 주면 한국인 교관으로 우리 실정과 분위기에 맞게 정치 훈련과 군사 훈련을 철저히 부과하겠다고 주장해, 결국 학생의 정치 · 군사훈련은 한국인 교관이 담당하고 경영은 중국 측에서 담당하게 된 것이다. 지도 방침은 민족정신을 고취하는 정치 훈련과 40%, 내무과 10%, 전술과 30%, 학과 20% 비율로 배정해 정신교육과 전술 교육에 치중하였다. 구체적인 교과목은 조선 혁명에 관한 훈화, 사회학 · 세계경제 · 특무공작 · 경제학 · 보병조전(步兵操典) 및 소총 · 기관총 조립법과 정치학 · 실과교련 등이다.
당초 계획과는 달리 1935년 4월 1기생 62명을 배출시킨 뒤 한인훈련반은 끝을 맺게 되었다. 한인훈련반이 일본에 탐지되어 난징에 있는 일본 영사가 중국 정부에 해산을 요구하였고, 일본과 정식 결전을 꺼리고 있던 중국 정부의 처지가 난처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이들 졸업생으로 비밀결사를 조직, 상하이 · 만주 · 국내 · 일본 등 각지에 파견해 국내외 여론의 조사 보고, 일본의 중국 침략 방해저지공작 전개, 국내에 잠입해 작전 정보의 수집 송달 등의 특수 공작을 담당하게 하였다.
중국 · 만주에서 항일무장투쟁에 앞장섰던 독립군 지도자의 대부분이 낙양군관학교의 교관이나 장교 후보생으로 훈련을 받았던 인물들이었음을 볼 때 낙양군관학교 한인훈련반은 한국무장독립운동사에서 그 위치를 뚜렷이 차지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