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은 신암(信奄)·서리로(西利潞)·안삼재(安三才)·조한용(趙漢用)·장진구(張震球). 안중근(安重根)의 동생으로 황해도 신천(信川) 출신이다.
1909년 평남 진남포보통학교 부훈도(副訓導)로 재직하다 안중근 의사의 의거가 일어난 직후 사직하였다.
1919년 상해(上海)의 임시정부에 가담하여 이듬해 1월 모스크바밀파외교원에 선정되었다. 그 해 10월에는 임시파로외교위원(臨時派露外交委員)에 선임, 러시아를 상대로 외교활동을 벌였다. 1921년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정원(議政院)의 황해도의원으로 선임되었다.
한편, 1920년 12월에는 상해대한인거류민단의사회(上海大韓人居留民團議事會) 의원으로 선임되고, 1926년 2월에는 여운형(呂運亨)의 후임으로 상해한인교민단장(上海韓人僑民團長)에 임명되어 상해에 거주하는 한인들의 결속을 위해 노력하였다.
1926년 5월에는 조상섭(趙尙燮)·최창식(崔昌植)·이유필(李裕弼)·오영선(吳永善) 등과(獨立運動促進會)를 조직, “한국 민족의 해방을 촉성하기 위하여 철저한 독립운동자의 조직적 대단결을 달성하려 한다.”는 선언을 발표하고, 그 회장이 되어 활동하였다. 1930년 상해에서 김구(金九)의 주도로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이 창당되자 여기에 가담하였다.
이 후 한국독립당의 간부 겸 김구의 심복으로 상해에 근거를 두고 항주(杭州)와 남경(南京)을 오가며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31년 김구 등과 한국독립당의 별동대인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을 조직하고, 이봉창(李奉昌)·윤봉길(尹奉吉)의 폭탄의거를 계획하였다. 1933년에는 친일분자 옥관빈(玉觀彬)의 처단에도 관여하였다.
1934년 낙양에 설립된 낙양중앙군관학교(洛陽中央軍官學校) 분교에 한인군관학교를 설치하고 학생들에게 군사훈련을 시켰다. 남경에 설립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朝鮮革命軍事政治幹部學校)에도 관여하였으며, 남경에서 대한교민단(大韓僑民團)의 명예위원으로도 활동하였다.
1935년 7월 5일 의열단(義烈團)·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신한독립당(新韓獨立黨)·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대한독립당(大韓獨立黨) 등 5개 단체 대표가 민족유일당으로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을 수립하자 한국독립당의 일원으로 참여하였다.
그러나 김구 계열과 김원봉(金元鳳) 계열이 갈등을 빚어 민족혁명당이 분열되자, 1935년 11월 김구 등과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을 조직해 당원으로 활동하였다.
1937년 2월 안우생(安禹生) 등에게 한국청년전위단(韓國靑年前衛團)을 결성하도록 하였으며, 7월 임시정부를 중경(重京)·곤명(昆明)으로 옮기면서도 대일항전세력을 하나로 묶기 위해 대한민국임시정부·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한국청년단(韓國靑年團)·한국청년전위단·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 등과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韓國光復運動團體聯合會)를 결성하였다.
한편 김구 등과 함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유지·발전에 기여하여 1936년 상임국무위원(常任國務委員), 1937년부터 1940년까지 의정원(議政院) 황해도의원 등으로 활동하였다.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