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은 김빈(金斌)·김빈(金彬)·조국동(曺國棟). 부산 출신이다.
1919년 봄 중국 상해(上海)로 망명한 뒤 그 해 1919년 11월 10일 길림(吉林)에서 조직된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였다. 1920년 9월 14일 부산경찰서 폭탄투척의거에 관여하였다. 당시 의열단원 박재혁은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옥중 단식 순국하였다.
1932년 4월 29일 홍구공원(虹口公園)에서의 윤봉길 의사(尹奉吉義士) 폭탄의거 후 중국국민당 정부의 지원으로 남경(南京) 교외 탕산(湯山) 혹은 강소성(江蘇省) 강녕현(康寧縣)에 설립되었던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朝鮮革命軍事政治幹部學校: 약칭 조선혁명간부학교, 이칭 조선혁명간부훈련반, 통칭 의열단 간부학교) 제2기 군사교관으로 1933년 9월 16일부터 1934년 4월 20일까지 활동하였다.
1932년 10월 25일에 의열단(남경에 근거)·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상해)·한국혁명당(韓國革命黨: 남경)·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 만주·북경)·한국광복동지회(韓國光復同志會) 대표 9명이 상해의 동방여사(東方旅舍)에서 결성한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韓國對日戰線統一同盟) 제2차 대표회가 1934년 3월 1일 남경(南京)에서 개최되었다.
이에 박건웅(朴建雄) 등과 함께 의열단 대표로 참석,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의 결속을 다지고 대일항전의 효과적인 방안을 모색하였다. 1935년 7월 5일 의열단·한국독립당·신한독립당·조선혁명당·대한독립당 등 5개 단체 대표가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을 해체하고 민족유일당으로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을 수립하자, 의열단파 민족혁명당의 간부 겸 김원봉의 비서로 능숙한 중국어 실력을 이용해 중국측에 보내는 문서 집필을 담당하였다.
1938년 중국의 한커우[漢口]에서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가 조직되자 이에 관계하였고, 1941년 조선의용대의 김원봉 계열 부대가 광복군(光復軍) 제1지대로 편입되자 광복군에 참여, 1945년 왕영재(王英哉)·진춘호(陳春浩)·여정순(呂正淳)·호건(胡建) 등과 인도(印度) 파견 공작원으로 선발되기도 하였다. 해방 후 남경(南京)에 머무르며 활동하다 1946년경 순국하였다.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