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공삼(公三). 광주(光州) 출신. 가협산(加峽山) 산중에 궁벽하게 살아 잘 아는 사람이 적었으나 강개하고 절개가 높았다.
1907년 기삼연(奇參衍)이 이끄는 의병진(義兵陣)에 참여하여 군사를 모집하고 병기와 군량을 모으고, 호남창의맹소(湖南倡義盟所)의 중군장(中軍將)으로서 활동하였다.
1908년 1월 2일(음력) 기삼연 의병장이 광주시 서천교(西川橋) 밑 백사장에서 전사하자 박도경(朴道京) 등과 함께 잔여의병을 수습하고 의병장에 추대되었다.
김봉규는 박도경을 포사장(砲士將)에 임명하고 각지에 통문을 보내에 의병을 모집하였다. 이에 부응한 김영엽의진(金永燁義陣)과 연계하여 전남 광산(光山)을 공략하기로 모의하였으나 1909년 2월 12일 장성(長城)의 운문암(雲門庵)에서 김영엽이 유종여(柳宗汝)에게 살해되자 그 계획을 실천에 옮기지는 못하였다.
김봉규는 김영엽의 원수를 갚으려 박도경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손룡산(孫龍山)에 가서 하수인 2인은 처단하였으나 유종여는 놓쳐버렸다.
이후 김봉규는 전라남도 장성(長城)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의병을 모집하여 군사훈련을 시키면서 후일을 기약하였다. 1909년 말 일본군에게 박도경과 함게 체포되어 대구에 압송되었다.
적이 회유하자 김봉규는 “본국의 신민으로서 국가의 망하는 것을 보고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찾으려고 하는 것은 천지간의 바른 도리”라고 하면서 절개를 굽히지 않아 사형을 받고 순국하였다.
순국 후 모양(牟陽: 고창군)의 인사들이 고향에 옮겨 장사지냈다. 정부에서는 박봉규의 공을 기리어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