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후인 1919~1920년 신덕영(申德永)·최양옥(崔養玉) 등은 대동단(大同團) 및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연계하여 전라도 등지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다 체포되어 수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신덕영과 최양옥은 출옥 후 중국으로 망명하여 1928년 산시성 타이위안에서 안창호(安昌浩)의 민족유일당운동(民族唯一黨運動)에 영향을 받아 안창남(安昌男) 등과 독립을 위해 함께 노력한다는 의미에서 대한독립공명단을 조직하였다.
단장·부단장 외에 군사부·재정부·정치부를 두고 활동하였으며, 3개 사단 7만 5000명의 군대를 양성한 후 국내로 진격하여 독립을 쟁취하려 하였다. 또한 대동단, 대한민국임시정부, 흥사단 등과 연계하여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였으며, 중국의 장개석(蔣介石), 염석산(閻錫山) 등으로부터도 지원을 받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여의치 않자 국내에 단원을 파견하여 현금 우송 차량으로부터 군자금을 마련하려 하였다.
1929년 초 최양옥과 김정련(金正連)은 국내에 들어와 이선구(李善九)를 동지로 가입시킨 후 양주군 화도면과 미금면의 경계인 마치고개에서 춘천에서 서울로 오는 우편차량에 보관된 현금을 탈취하려 하였다. 이들은 4월 18일 마치고개에서 우편차량을 장악하였으나 불행하게도 차내에 현금이 없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계획의 실패 후 최양옥·김정련·이선구는 양주군 천마산과 서울의 아차산, 뚝섬 등지로 도망 다니다가 며칠 후 체포되어 징역 5~10년의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리고 타이위안에서 비행기 조종사로 활동하던 안창남은 1930년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였고, 신덕영도 1932년 하얼빈에서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로 인해 1930년대 초 조직이 와해되었다.
대한독립공명단은 1920년대 중반 국내외의 지원이 약화되어 독립운동의 전개가 힘들던 시기에, 포기하지 않고 모험적 거사로 군자금을 마련하여 항일무장독립운동을 전개하려고 하였던 점에서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