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계 군자금모집원으로 평안남도 순천군 출신이다. 고향에서 잡화상을 경영하던 중 3·1운동이 일어나자 만세시위운동에 참가하였다.
3·1운동 후 평양의 숭실학교(崇實學校)에 다니고 있던 기독교 장로파 신도인 이창해(李昌海)·조기수(趙基洙)와 군자금을 모집, 상해에 있는 임시정부로 보냈다.
1919년 11월 평양에서 김병항(金炳恒)·주기정(朱基鼎)·이창해·조기수·윤홍수(尹弘洙) 등과 군자금을 모집하기로 계획하고, 자신은 조기수와 한 조가 되어 평양·순천 등지에서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한편, 서간도 유하현(柳河縣)에서 배일민족운동을 전개하던 최병갑(崔炳甲)이 그 달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고향인 평안남도 성천(成川)으로 돌아오자, 최병갑·박돈수(朴敦洙)·김홍록(金洪錄)과 함께 비밀결사 숭의단(崇義團)을 조직하였다.
같은 해 12월에는 공성단(共成團)을 조직, 1920년 초까지 평남 각지에서 독립운동사상을 고취하는 한편, 군자금을 모집하여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보냈다. 1920년 1월 조기수·한국언(韓國彦)·최태준(崔泰俊)과 함께, 일경에게 주기정을 밀고하여 체포되게 만든 평안남도 성천의 정현조(鄭炫祚)의 집을 불태우고 정현조와 그 가족을 처단하였다.
그 후 약 1개월간 삼덕면 삼중리(三中里)의 어린 시절 학우인 이치범(李致範)의 집에 거처하며, 한국언과 함께 신창면에 있는 최홍주(崔洪柱)의 집을 습격하였다.
3월에는 박돈수·김홍록과 함께 천성면(天成面) 석봉름(石峯廩)의 집에 가서 군자금을 모집하고, 최병갑과 함께 삼덕면(三德面)의 최치민(崔致珉)의 집에 가서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5월에는 쌍룡면(雙龍面) 조대술(趙大述)의 집에 가서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1920년 5월 29일 성천군 사주면(四佳面) 신흥리(新興里)에서 최병갑과 함께 잠복 중, 일본 경찰의 습격을 받고 총을 쏘며 완강히 저항하다 체포되었다. 지방법원·복심법원·고등법원에서 모두 사형을 언도받고, 1922년 7월 22일 평양감옥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