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항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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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때, 임시정부 국무원에서 활동하며 김구를 보좌하였고, 해방 이후, 한국독립당 선전부장 등을 역임하다가 납북된 정치인 · 독립운동가.
이칭
이칭
엄대형(嚴大衡), 일파(一波)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98년(고종 35) 9월 1일
사망 연도
1962년 7월 30일
본관
영월
출생지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 주록리 90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엄항섭은 일제강점기 임시정부 선전부장,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상무위원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정치인이다. 1898년 경기 여주 출생으로 1919년 3·1운동 시기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해방 전까지 재중국한인청년동맹 위원, 한국독립당 조직책, 김구 주석의 판공비서 등으로 활동하였다. 해방 후에도 김구를 보좌하였고, 1948년 4월 한국독립당 대표단 5명과 함께 평양으로 향했다. 1950년 납북되었으며, 1958년 반당·반혁명 혐의로 체포된 후 4년 후 지병으로 사망하였다. 1987년 재북 인사에 대한 독립유공 표창의 일환으로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목차
정의
일제강점기 때, 임시정부 국무원에서 활동하며 김구를 보좌하였고, 해방 이후, 한국독립당 선전부장 등을 역임하다가 납북된 정치인 · 독립운동가.
내용

1898년 9일 1일 경기도 여주군(현재의 여주시) 금사면 주록리 90번지에서 출생했다. 본관은 영월(寧越), 호는 일파(一波)이다. 일명 엄대형(嚴大衡)으로 불렸으며, 중국 망명 당시에는 ‘예빗 · 엄’이라고도 불렀다.

1919년 보성법률상업학교를 마칠 무렵, 3·1운동이 일어나자 중국으로 망명하여 임시정부 국무원 법무부 참사에 임명되었고, 임시의정원의 지역대표 의원을 선출하기 위한 경기도 여주군 담당 국내 조사원이 되었다.

1922년 항저우[抗州] 지강대학(芝江大學)에서 수학하고, 김구의 의정활동을 보좌하였다. 1924년에는 상해한인청년동맹회 발기인, 집행위원, 재정부장이 되었고, 1926년 12월에는 헌법기초위원에 선임되었다.

1929년부터는 청년운동에 참여하여 재중국한인청년동맹 중앙위원이 되었으며, 1930년 1월 창당된 한국독립당의 조직책 가운데 한 명으로 활동했다. 1931년에는 상해 한국교민단의 의경대장(義警隊長)이 되었고, 자활자위(自活自衛)를 목적으로 하는 공평사운동(公平社運動)에도 참여하였다. 1932년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었고, 한국독립당 선전부장을 맡았다.

1941년 다시 의정원 의원이 되어 외무위원장직을 맡았으며, 1944년 5월에는 임시정부 국무원 선전부장과 김구 주석의 판공비서에 임명되었다.

해방 후인 1945년 11월 23일 임정 요인 제1진으로 환국하여 한국독립당 선전부장으로서 김구를 보좌하여 김구 명의의 발표 성명이나 국민에게 발표하는 호소문 등을 대부분 기초하였다. 1946년 2월 1일 개최된 비상국민회의에서 선전위원장이 되었으며, 1947년 3월 1일 국민의회 전국대표자대회의 임시정부 확대 강화에 따른 정무위원 개편에서도 정무위원이 되어 선전부장에 임명되었다.

1948년 4월 20일 한국독립당 대표단 5명과 함께 평양으로 가, ‘전조선제정당사회단체대표자연석회의(남북연석회의)’와 ‘남북조선제정당사회단체지도자협의회(남북요인 15인 회담)’에 참석하고, 대회결정서(4월 30일 공동성명) 초안작성위원(7인)에 선임되었다.

1950년 한국전쟁 때 납북되었다.

이후 엄항섭 등 재북(在北) 인사들은 1954년 제네바 회담의 개최를 계기로 자신들의 통일 방안을 설명하기 위해 북측 대표 외에 자신들의 대표단 파견을 북측 당국에 요구하였다. 그 결과 엄항섭과 권태양이 대표로 선발되어 모스크바로 파견되었으나 스위스 당국의 비자 발급 거부로 평양으로 되돌아왔다.

1955년 11월 12일 엄항섭은 오하영 · 윤기섭 · 조소앙 · 송호성 · 안재홍과 더불어 6인 공동 성명을 발표했는데, 이 성명은 “남반부의 정사 · 군사 · 경제 · 문화 각계각층 지도자들에게” 보내는 ‘호소문’으로 “해방 10주년 경축대회에서 제기된 통일 방안을 지지하고, 남북협상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그 실천 노력을 촉구”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 내용은 이들 6인의 본의와는 달리 왜곡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1956년 7월 2~3일 열린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결성대회에서 주석단의 1인으로 참석하여 상무위원 11인과 집행위원 29인 중 1인으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1958년 ‘반당 · 반혁명 행위’ 혐의로 체포되었다.

1962년 7월 30일 평양에서 지병으로 사망했으며, 북한 신미리 애국열사릉에 묻혀있다.

상훈과 추모

정부 수립 이후 한국 정부는 오랫동안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참여한 행적이 뚜렷하더라도 해방 이후 사회주의 운동을 계속했거나 이북에서 활동한 인사들에 대해서는 독립유공자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1987년 한국 사회 전반의 민주화 진전 분위기 속에서 재북(월 · 납북) 문학인 작품의 해금 등과 함께 재북 인사에 대한 독립유공 표창이 이루어졌다. 그 일환으로 엄항섭에게도 1989년 3월 1일,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독립유공자공훈론』(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북한정치사연구』Ⅰ건당·건국·건군의 역사 (김광운, 선인, 2003)
『압록강변의 겨울』(이태호, 다섯수레, 1991)
「북의 통일정책과 월·납북인의 통일운동(1948~1961)」(이신철,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박사학위 논문, 2005)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일파 엄항섭 지사」(최병수,『충북사학』10, 1998)
집필자
최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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