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관내 지역의 유일당(唯一黨) 운동(運動)이 좌절되자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중심으로 안창호(安昌浩), 이동녕(李東寧), 이시영(李始榮) 등을 포함한 28명의 인사들이 1930년 1월 25일 결성한 민족주의 세력의 결집체였다. 이 시기의 한국독립당은 상해 한국독립당으로도 불리운다.
해외 독립운동 전선 통일과 지방 파벌 청산을 목표로 설립된 한국독립당은 이사장제를 채택해 초대 이사장에 이동녕을 추대하였다. 이사(理事)는 조완구(趙琬九), 안창호, 이시영, 조소앙(趙素昻), 김구(金九), 김철(金澈)이 맡았다.
당의 활동 방안 등은 당원 전체가 모이는 당대표대회(黨代表大會)를 통해 논의하여 결정하였으며, 이사들은 이사회를 통해 당의 실무를 맡았다. 집행부서로 총무부, 재무부, 선전부, 내무부, 비서부 등을 두었다. 조소앙의 삼균주의(三均主義)를 당의 주의로 표방하였다.
비밀리에 조직되었던 한국독립당은 1931년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의 명의로 발표된 「대한민국임시정부선언(大韓民國臨時政府宣言)」을 통해 모습을 드러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한국독립당의 표현기관(表現機關)이라 밝히며, 임시정부와 한국독립당이 한 몸임을 알렸다.
이봉창(李奉昌)과 윤봉길(尹奉吉)의 의거 이후 거세진 일제의 검거로 한국독립당 주요 인사들은 상하이를 떠났으며, 독립운동자금 문제로 내분을 겪기도 하였다. 위기를 타개하고자 1933년 1월 15일 상하이에서 ‘재호한국독립당대회(在滬韓國獨立黨大會)’를 개최해 조직을 재정비하였다. 이사장은 송병조(宋秉祚)가 맡았다.
당대회가 있고 약 1년 후 당 본부를 항저우로 이전하며 새로운 활동을 꾀했다. 기관지 『진광(震光)』을 발간하였고, 1934년 3월 3일에는 강병학(康秉學, 康秉鶴)의 의거를 일으키게 하였다.
1932년부터 김규식(金奎植)에 의해 진행된 민족 유일당 결성 운동인 '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韓國對日戰線統一同盟)'에 참여하였다. 통일동맹은 창립 초기에는 소속 단체 간의 연락기관으로 기능하였으나, 단체 통일을 위해 각 단체들이 노력한 결과 한국독립당은 1935년 5월 25일 임시대표회를 소집해 신당 결성 회의에 참석하기로 하였다.
6월 20일 난징[南京]에서 열린 ‘각혁명단체대표대회’에 참석한 한국독립당은 7월 5일 통일 정당인 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이 결성되면서 자진 해산하였다. 조선민족혁명당 참가를 반대한 김구, 이동녕 등은 11월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을 창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