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완구는 일제강점기 임시의정원 의원, 대한민국임시정부 내무장, 내무부장, 재무총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1881년(고종 18)에 태어나 1955년에 사망했다. 대종교에 입교하여 북간도 용정 일대에서 선교활동을 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상해로 가서 임시정부의 재무총장과 내무부장 등 국무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의정원회의에서 주선하여 대통령 중심제로 개헌하고 단일통합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출범하게 하였다. 김구와 함께 한국광복군을 결성하였으며 1945년 귀국하였다가 6·25전쟁 때 납북되었다.
호는 우천(藕泉). 서울 출신이다.
일찍이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해 1915년 5월 대종교를 포교할 목적으로 북간도 용정(龍井) 일대에 가서 수많은 동포를 상대로 약 3년간 선교활동에 종사하였다.
1918년 11월 제1차 세계대전이 종료되면서 약소국가들이 독립을 선포하자 이동녕(李東寧) · 이시영(李始榮) · 조성환(曺成煥) · 김동삼(金東三) · 조영진(趙英鎭) 등 30여 명과 같이 상해(上海)로 갔다.
1919년 3·1운동이 국내에서 일어나자 4월 상해에 1,000여 명의 독립동지가 모였을 때, 동지들과 같이 상해로 왔다.
프랑스 조계(租界) 내 김신부로(金神父路) 22호에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한 이래, 1945년 11월 중국 충칭[重慶]으로부터 귀국할 때까지 27년간 지조를 지키면서 독립운동에 종사하였다.
안창호(安昌浩)가 미주에서 도착하기 전에 국내와의 교통 통신을 원활하게 소통하기 위해 교통국을 설치하였다. 또 임시의정원 의원과 국무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발전, 고수하는데 노력하였다.
또한, 신규식(申圭植) · 이동녕 · 김백련(金白連) · 백순(白純) · 정신(鄭信) · 박찬익(朴贊翊) 등과 함께 상해에 대종교의 교회를 설립 · 운영하였다. 국무원의 수석위원으로 구황실(舊皇室) 우대론을 펴서 20대와 30대 초반의 신식대학교육을 받은 동지로부터 공격을 받기도 하였다.
여운형(呂運亨) · 김진우(金振宇) · 장붕(張鵬) 등 의정원의원과 함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노동국을 농무부, 노동국총판(勞動局總辦)을 농무총장(農務總長)으로 바꾸는 개정작업을 펴서 성사시켰다.
1919년 9월 11일 의정원회의에서 대통령중심제로의 개헌을 주선해서 단일 통합의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출범하게 하였다.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하나의 정통 정부로 통합되자 1920년 9월 내무차장, 1924년 5월에 노동국총판이 되었다. 이후 재무총장 · 국무위원 · 내무장 · 내무부장 등 국무위원으로서 요직을 두루 거쳤다.
1920년 10월 교민단(僑民團)을 이유필(李裕弼) · 김구(金九) · 여운형 · 김철(金澈) 등 20여 명과 조직, 재상해거류민의 자치와 권익 옹호에도 앞장섰다.
1921년 12월 이동녕 · 신규식 · 이시영 · 윤기섭(尹琦燮) · 황중현(黃中顯) 등 10여 명과 함께 대한민국임시정부과 이승만(李承晩)을 옹호하기 위해 협성회(協誠會)를 조직, 임시정부 반대세력 정구단(正救團)과 대결하였다.
1924년 7월 이동녕 · 안창호 · 여운형 · 신익희(申翼熙) · 김용철(金容喆) · 이유필 · 조상섭(趙尙燮) · 송병조(宋秉祚) · 이강(李剛) · 조덕진(趙德津) · 김붕준(金朋濬) · 이규홍(李圭弘) · 윤자영(尹滋英) 등 20여 명과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 일명 韓國獨立時事策進會: 포석로 안창호 자택)를 조직하였다.
1931년 11월 중순경 상해에서 한국측 인사 김구 · 김철 · 조소앙(趙素昻) · 이유필 · 안경근(安敬根) 등과 중국측 인사 우쳉칸[伍澄干] · 주쿵모[周公謨] 등과 같이 중한항일대동맹(中韓抗日大同盟, 일명 中韓民族抗日大同盟)을 조직, 항일투쟁을 중국과 연합해 전개하였다.
유근(柳瑾)의 추도회를 이동녕 · 최창식(崔昌植) · 김인전(金仁全) 등 10여 명과 같이 상해 한국동포 거류민단 사무소에서 개최하였다. 이승만 지지파로서 한국독립당을 조직했고 재건한 바 있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尹奉吉) 의거 때 대한민국임시정부 내무장으로서 이동녕 · 김구 · 조소앙 · 김철 등과 함께 극비리에 훙커우[虹口]공원 투탄의거를 수행하였다.
이에 앞서 이봉창(李奉昌)의 의거에도 가담해 활동하였다. 윤봉길 의거로 인해 이동녕 · 이시영 · 김구 등과 함께 박찬익 · 민석린(閔石麟)의 도움으로 자싱[嘉興] · 항저우[杭州] 등지로 피신하였다.
그 뒤 전장[鎭江] · 창사[長沙] · 광저우[廣州] · 류저우[柳州] · 치장[綦江]을 거쳐 충칭에 정착, 1940년 9월 17일 김구 등과 같이 한국광복군을 결성하였다.
광선조직(光線組織)에 기여하고 이동녕 · 김구 등과 같이 1935년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을 전장에서 결성, 뒷날 한국독립당으로 합류하였다.
1943년 김원봉(金元鳳)의 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의 황민(黃民) 등 10여 명의 청년들이 김구의 경호대원 박수복(朴守福)을 매수, 김구와 조완구 등 5명의 국무위원의 암살기도를 사전에 정보를 입수 · 적발해 전원을 체포하였다.
1945년 11월 김구 등과 같이 귀국해 건국에 종사하다가 6·25전쟁 때 납북되었다.
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