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중국 상하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이후 사회주의 계열의 이동휘(李東輝) 등이 참여하면서 통합된 독립운동 최고기관으로서 자리매김하였다. 그러나 무장투쟁 노선과 외교독립 노선으로 대표되는 독립운동의 노선 갈등을 비롯한 여러 문제로 인하여 임시정부의 역할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기 시작하였다.
그 과정에서 임시정부의 해산을 요구하는 창조파(創造派)의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 요구가 거세졌다. 1921년 2월 초 박은식(朴殷植), 원세훈(元世勳), 김창숙(金昌淑), 왕삼덕(王三德), 유예균(劉禮均) 등 14인의 이름으로 발표된 '우리 동포에게 고함'은 이러한 요구의 정점이었다.
임시정부를 옹호하는 인사들도 이에 대응하였다. 조완구, 윤기섭, 이동녕 등 45명의 인물들은 당시 임시정부 대통령인 이승만과 임시정부 체제에 대한 지지를 요구하는 선언을 발표하고, 임시정부를 옹호하기 위한 단체로 1921년 4월 23일 협성회를 조직하였다.
다음날인 4월 24일 상하이 프랑스 조계(租界) 서문(西門) 밖에 있던 혜령전수여학교(惠靈專修女學敎)에서 발회식을 개최하고 3대 강령을 발표하였다. 강령의 내용은 '임시정부의 유지'라는 절대적인 명제에 초점을 두었다.
윤기섭의 거처를 중심으로 130여 명의 단원들이 활동을 하였다. 임시정부 간부가 중심이 되어 연설회 등을 개최하였으며, '우리 동포에게 고함'에 서명한 인물들에 대하여 압력을 가하기도 하였다. 박은식을 힐책하다 이에 항의하던 박은식의 아들 박시창(朴始昌)을 공격하기도 하였고, 여운형(呂運亨)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협성회를 주도하던 조완구와 윤기섭은 1921년 5월 7일 이승만이 마지막으로 실행한 개각에서 각각 내무부 차장과 군무부 차장으로 임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