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완은 일제강점기, 전라북도 고창군 무장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 · 1운동 당시 서울의 만세시위운동에 참여한 뒤, 3월 15일 고향인 전라북도 고창군 무장 장터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1919년 2월 말 고종의 인산(因山)에 참여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간 김영완은 3월 1일 서울의 만세시위운동에 참여하였다. 서울의 상황을 목도한 뒤, 3월 10일경 독립선언서 등을 가지고 고향 고창군 무장으로 내려왔다.
마을 유지 이용욱(李用郁), 김용표(金容杓), 김상수(金相洙), 이준구(李俊久), 김진호(金辰鎬), 박흥선(朴興先), 오태근(吳泰根), 박흥수(朴興洙) 등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이들과 함께 고창에서도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들은 3월 15일 무장 장날을 기하여 거사를 단행하기로 하고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제작하는 등 제반 준비를 진행하였다.
3월 15일 오전 10시경 이들은 무장 장터에서 장꾼들이 모이기를 기다렸다가 미리 등사해 둔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군중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김영완은 군중들 앞에 나서서 직접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김영완은 환호하는 군중들과 함께 태극기를 높이 들고 선두에서 군중을 지휘하며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만세시위 행렬은 면사무소와 주재소 쪽으로 가서 수백 명의 시위대와 함께 남문까지 나아갔다.
하지만 일본 군경의 폭력적인 탄압으로 군중들은 해산되고 김영완 등 다수가 체포되었다. 김영완은 5월 21일 광주지방법원 정읍지청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되어 옥고를 치르던 중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1977년 대통령표창,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