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나라를 잃은 이후 서간도와 북간도로 이주한 한인들은 각지에서 한인 자치와 독립운동을 위한 단체를 조직하였다. 그중 유림(儒林)들이 주체가 되어 조직한 단체가 농무계(農務契)이다.
서간도에서는 국내에서 의병을 일으켜 구국 항쟁을 하던 백삼규(白三圭), 조병준(趙秉準) 등이 중심이 되어 1910년 관전현과 환인현에서 농무계가 조직되어 주민들에게 애국심과 단결심을 고취하고, 청년들을 규합하여 군사 훈련에 주력하였다. 또한, 미간지(未墾地)를 개간하여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며 재기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1919년 3 · 1운동이 발발하자 농무계를 비롯하여 보약사(保約社), 향약계(鄕約契), 포수단(砲手團)의 대표들이 유하현 삼원보(三源堡)에 모여 각 단체를 해체하고 통일 단체로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을 조직하였다.
북간도에서는 1913년 6월 연길현 지인향(志仁鄉) 솔만자에서 유림들이 농무계를 설립하고, 총회를 솔만자 남촌에 설치하였다. 용신향 칠도구와 개태향 회경가에는 지회를 두었다. 총회장에 최남기(崔南起), 총무에 한진동, 지회장에 장문칠, 문술모, 설유위, 홍자문 등이 선임되었다.
북간도 농무계는 1913년 4월 기독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설립된 간민회(墾民會)에 대항하여 조직된 것이었다. 때문에 북간도 한인 사회의 주도권을 두고 두 단체 간에 갈등과 대립이 발생하였다. 결국 1914년 3월 중국 당국의 포고에 의해 간민회와 농무계는 모두 해산되었다.
이후 간민회와 일부 농무계 성원들이 공동으로 발기하여 1914년 5월 장업회(獎業會)가 조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