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는 유평(幼平), 호는 국동(菊東). 평안북도 의주 출신.
1895년(고종 32)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시해되자 복수할 것을 결심, 유인석(柳麟錫) 의병부대에 참가해 평안도의병장으로 각지에서 항전하다가 붙잡혀 2년간 복역하였다.
1910년 국권이 상실되자 다시 의병을 규합하여 창성(昌城)의 일본헌병대를 습격하는 등 항일전을 전개하다가 만주로 망명하였다. 1919년 4월 재만 각 단체대표 560명이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에 회동해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을 결성하고 총단장 조맹선(趙孟善), 부단장 최영호(崔永浩)를 추대할 때 총참모(總參謀)에 임명되었다.
그 해 7월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연통제(聯通制)를 실시하자, 12월경 평북독판(平北督辦)에 임명되었다. 이후 국내에 연통제 조직을 확산시키는 한편, 대한독립단의 국내 조직도 아울러 확대시켜나갔다.
그 뒤 대한독립단이 왕조의 부흥을 목적으로 하는 복벽주의자(復辟主義者)와 민주정권의 실현을 주장하는 공화주의자(共和主義者)로 양분되었을 때, 민국(民國)을 주장하는 민국독립단(民國獨立團) 도총재(都總裁)로 추대되어 상해(上海)의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유기적인 연락을 취하였다.
1920년 각 단체가 통합해 대한민국임시정부 산하에 군사기관인 대한광복군사령부(大韓光復軍司令部)와 교민통치기관인 대한광복군참리부(大韓光復軍參理部)가 결성되자 참리부장에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그 해 10월 일본군에 의해 재만교포가 무수히 참살당한 이른바 경신참변이 발생하였다. 이에 동지들의 가족 100여 세대를 유원성 포두현(綏遠省包頭縣)으로 이주시키고 황무지를 개간, 배달농장(倍達農場)을 만들어 자활의 터전을 마련하고 의민부(義民府)를 조직, 총재로 추대되었다.
또한, 농장의 수입을 대한민국임시정부로 송금하고, 배달학교(倍達學校)와 대종교(大倧敎) 시교당(施敎堂)을 만들어 청년들에게 애국심과 민족정신을 고취하였다. 1931년 10월 중국군과 합작해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