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맹선 ()

근대사
인물
일제강점기 때, 의병활동을 전개하다가 남주로 망명해 대한독립단 총단장, 광복군 사령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이칭
원석(圓石)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1922년
출생지
황해도 평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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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일제강점기 때, 의병활동을 전개하다가 남주로 망명해 대한독립단 총단장, 광복군 사령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생애 및 활동사항

호는 원석(圓石). 황해도 평산 출신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김동필(金東弼) 등과 같이 대한13도유약소(大韓十三道儒約所)의 이름으로 5적을 참형에 처할 것을 상소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동지 박정빈(朴正彬)·우병렬(禹炳烈)·이진룡(李鎭龍)·박장호(朴長浩)·홍범도(洪範圖) 등과 함께 평산에서 의병을 일으켜 참모장으로 일본군과 싸웠다. 이어 경의선 계정(鷄井), 예성강 연안 일대에서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의병 토벌작전으로 국내에서의 활동이 어렵게 되자 남만주로 망명, 홍범도·윤세복(尹世復)·차도선(車道善) 등과 포수단(砲手團)을 조직해 장백(長白)·무송(撫松)·임강현(臨江縣) 등지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를 기반으로 만주 지역에 흩어져 있는 동포를 규합해 항일사상 고취와 계몽운동에 진력하였다. 그러면서 국내와 긴밀한 연락을 취해 군자금 모집운동을 전개하고, 애국청년들을 만주로 불러들여 군사 훈련을 실시하였다.

1916년 10월에는 이진룡과 협의해 포수단의 황봉선(黃鳳善)·황봉운(黃鳳雲)·김원섭(金元燮)·김일(金鎰)·김효선(金孝善) 등과 함께 국내로 잠입했다. 평안북도 운산에서 미국인이 운영하는 금광회사의 송금차를 습격하였으나 실패하고 다시 만주로 돌아왔다.

1918년 1월 차도선·신봉황(申鳳荒) 등과 함께 충의사(忠義社)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압록강을 넘어 국내로 진격할 계획으로 동지 규합과 병기 입수에 진력하였다. 4월에는 남북만주 전역에 걸쳐 흩어져 있던 독립군 진영을 통합해 대규모의 독립군단으로 확대할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는 만주 지역의 각 독립운동단체 및 의병장·유림대표·보약사(保約社)·향약계(鄕約契)·농무계(農務契)·포수단 등을 규합, 500여 명을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에 모았다. 3일간의 회의 끝에 종전의 단체를 모두 해체시키고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이라는 단일 기관을 조직하기로 하였다.

총재에는 박장호를 추대하고 자신은 총단장에 취임해 독립군 양성에 주력하는 한편, 만주 지역의 친일단체인 일민회(日民會)·보민회(保民會)·강립단(强立團) 등을 타도하는 데 앞장섰다.

1920년 2월 독립군 통합운동의 일환으로 대한독립단·대한의용군사의회(大韓義勇軍事議會)·한족회(韓族會)·대한청년단연합회 등 만주 일대의 군사기관이 통합되어 임시정부에 인준을 요청하였다. 군법을 위시한 제반 법령(7월 제정, 8월 1일 시행)이 완비됨으로써 임시정부 군무부(軍務部) 직할의 광복군사령부로 개편되었다. 이때 광복군사령장에 임명되었다.

1921년 4월 5일 평안남도 순천의 이병택(李炳鐸) 외 수 명이 광복군 총영에 가입하여 조맹선으로부터 권총 7정, 탄약 420발, 경고문을 받아서 배포하다가 순천서에 검거되었다. 1922년 길림성(吉林省) 추풍(秋風)에서 순국하였다.

상훈과 추모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대한민국독립유공인물록』(국가보훈처, 1997)
『대한민국독립운동공훈사』(김후경, 광복출판사, 1983)
『독립운동사자료집』14(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8)
『독립운동사』4·5(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2)
『한국독립운동사』3(국사편찬위원회, 1967)
『한국독립운동사』(애국동지원호회, 1956)
『무장독립운동비사』(대한민국공보처, 1949)
『高等警察關係年表』(朝鮮總督府警務局,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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