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4월 만주에서 의병대장 박장호(朴長浩) 등이 조직한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이 기원독립단(紀元獨立團)과 양분된 신구파 조직 중의 하나이다. 원래 대한독립단은 의병장들과 유학자들인 구국지사들이 사생결단으로 진충보국의 춘추대의를 실현시키기 위하여 조직하였다.
그리하여 한때 남북만주와 국내에서 열렬한 항일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총재부(總裁府) 간부는 태반이 완고한 노유(老儒)들이었기에 신진청년들과는 이념이나 사상이 상합(相合)되지 않았다. 이 때 연호문제(年號問題)가 거론되었다.
노유와 유림측에서는 단기(檀紀) 또는 융희(隆熙)를 주장하는 반면에, 청년측은 민국(民國: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따른다는 뜻) 연호를 각기 주장하여 타협이 이루어지지 않아 양파로 분열되었다. 일파는 기원파(기원독립단 전신), 다른 일파는 민국파(민국독립단 전신)로 불렸다. 전자는 구파, 후자는 신파라고 지칭되었다.
이에 기원파는 박장호를 비롯하여 백삼규(白三奎)·전덕원(全德元)·이웅해(李雄海) 등이 지도한 반면, 민국독립단은 젊은 층으로 조병준(趙秉準)·신우현(申禹鉉)·변창근(邊昌根)·김승학(金承學) 등이 지도하였다.
내분을 겪기는 했으나 대한독립단은 1920년 초반에 가서 한족회(韓族會)와 대한청년단연합회 등과 같이 통합을 진행하여 1920년 2월 상해 임시정부에 보고하였다. 이에 따라 광복군 설치가 인준되어 임시정부 법령에 따라 참리부와 사령부, 군영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인준을 신청한 상태에서 내분이 심화된 대한독립단은 1920년 4월 기원독립단과 민국독립단으로 분화하였다. 대한독립단은 임시정부 법령상 광복군에 참여하였으나, 대한독립단에서 분화한 민국독립단은 광복단 등 단체와 연합하여 1920년 7월 광복군총영을 조직하였다. 이로써 항일무장투쟁을 계속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