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호는 한말 강원도 지역에서 의병운동을 전개하였고, 일제강점기에는 중국 둥베이〔東北〕 지역의 독립운동 단체들이 독립 쟁취를 위한 단일 기관으로서 봉천성 유하현 삼원보에 조직한 대한독립단의 부단장을 맡아 활동하다가 노령에서 순국한 독립운동가이다.
최영호(崔永浩)는 강원도 사람이다.
최영호는 한말 강원도에서 의병 활동을 벌이다가 일본군의 탄압을 피해 압록강을 건너 서간도로 망명하여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에 가담하였다.
대한독립단은 박장호(朴長浩) · 조맹선(趙孟善) · 백삼규(白三圭) · 조병준(趙秉準) · 전덕원(全德元) · 박양섭(朴陽燮) 등 한말 국내에서 의병운동에 가담하였던 인사들이 설립한 단체이다. 이들은 1919년 4월 15일 중국 봉천성(奉天省: 지금의 랴오닝성)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甫) 서구(西溝) 대화사(大花斜)에서 560여 명의 독립운동가를 규합하여 대한독립단을 조직하였다.
대한독립단의 주요 인사로는 도총재(都總裁) 박장호, 부총재 백삼규, 총단장 조맹선, 부단장 김원섭(金元燮) · 최영호, 군사부장 전덕원, 참모부장 조병준, 총무부장 김평식(金平植), 재무부장 강세헌(康世憲), 서무 김일(金逸), 고문 안병찬(安秉瓚) 등이 있으며, 이외에 많은 부서와 간부들이 있었다. 아울러 평안남북도와 황해도 지역 및 만주의 집안현(集安縣) · 장백현(長白縣) 등지에 설치된 100여 개의 지단과 지부를 관할하는 임원들이 있었다.
대한독립단은 국내로 진입해 독립전쟁을 벌이고, 만주 지역 한인들의 자치를 이루려는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도총재 박장호 등은 1910년 8월 한일 강제 병합 이후 서간도 지역에서 보약사(保約社), 향약계(鄕約契), 농무계(農務契), 포수단(砲手團) 등의 단체를 조직하여 독립 역량을 기르던 중 3 · 1운동이 발발하자 이를 계기로 기존 단체를 통합하여 무장투쟁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대한독립단은 1919년 8월경 1,500여 명의 독립군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이 가운데 700명의 독립군을 하얼빈 러시아 부대에 보내 군사훈련을 받게 하였다. 이어 9월에 러시아 지역으로 2개 소대를 보내 훈련을 받고 무기 구매에 힘쓰게 하였고, 12월에 본부 밑에 4개 중대를 편성하여 남만주 제1사단이라 하고, 지린성〔吉林省〕 무송현(撫松縣)에 사단본부를 설치하였다. 1920년 3, 4월경 결사대를 평안도 각지로 보내 친일 세력을 처단하게 하였다.
대한독립단은 남만주 지역에 통일된 군사 기구를 설치하는 문제를 협의하는 과정에서 기원독립단과 민국독립단으로 분리되었다. 박장호 · 백삼규 · 전덕원 · 이웅해(李雄海) · 김평식 등 복벽주의(復辟主義) 계열 인사들은 단군 기원이나 대한제국 연호의 사용을 지지하며 기원독립단을 조직하였고, 조병준 · 신우현(申禹鉉) · 변창근(邊昌根) · 김승학 등 공화주의 계열 인사들은 임시정부 명호나 대한민국 연호의 사용을 지지하며 민국독립단을 이루었다.
이상과 같은 대한독립단에서 최영호는 부단장으로 활동하다가 1920년경 노령(露領)에서 피살 순국하였다.
1996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