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항선(吳恒善)은 1910년 10월 3일 중국 지린성〔吉林省〕 왕청현(汪淸縣) 석두하자(石頭河子)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오옥인(吳玉仁)이다. 부친은 동청철도 건설노동자로, 왕청현 석두하자로 홀로 이주하여 가족을 석두하자로 불러들였고,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만주 지방 총회 산하 석두하자 지방회 회장을 지낸 오사언(吳仕彦)이다. 남편은 김좌진(金佐鎭)의 부관을 지낸 독립유공자 유창덕(兪昌德, 1902~1931)이다.
독립만세운동과 민족종교 활동이 활발하였던 중국 지린성 왕청현 석두하자에서 4년간 소학교를 다니며 민족의식을 길렀다. 또한, 만주 지역의 여성들이 간도애국부인회(間島愛國婦人會), 훈춘애국부인회, 만주여자교육회 등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던 시대적 분위기의 영향을 받아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되었다.
1927년 17세 때 김좌진 장군의 부관 유창덕과 혼인하여 남편을 따라 대일 항쟁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1928년경부터 김좌진이 서거하는 1930년 이후까지 김좌진의 부인 나혜국(羅惠國)과 함께 독립군의 식사와 의복을 마련하고, 외부와의 기밀 연락을 담당하고, 무기를 운반 · 은닉하는 임무를 담당하였다.
1929년 1월 북만주 지역의 독립운동 단체인 신민부(新民府) 산하의 독립투사 40여 명이 석두하자에서 회의를 개최하다가 하얼빈〔哈爾濱〕 일본 영사관원의 습격을 받아 유정근(兪政根) 등 12명이 체포되었다. 이때 다른 동지들과 함께 피신하여 각지에 숨겨둔 무기를 운반하였다.
1930년 1월 김좌진이 헤이룽장성〔黑龍江省〕 해림시(海林市) 산시진(山市鎭)의 금성정미소에서 총격을 받고 사망하자 동지들과 함께 복수전을 계획하고 적의 동향을 탐지하였다. 아울러 같은 해 9월 하얼빈 주재 일본 영사관 습격을 위해 조직된 6인의 결사대원 중 고강산(高崗山) · 김수산(金壽山)에게 권총을 전달하였다. 이때 일제의 추적으로부터 무기를 은닉하는 임무를 맡았다.
1930년 10월 일본 영사관 습격 사건이 발각되어 남편과 함께 체포되어 일제 경찰에 모진 고문을 당하였으며, 이 소식을 접한 부친 오사언은 자결하였다. 1931년 10월 남편 유창덕과 동생 오해산이 일본군에게 피살당하였다. 오항선 역시 5개월간 고문을 당하였고, 1년 2개월간 투옥된 후 1931년에 석방되었다.
출소 후 고문 후유증을 겪다가 1935년 안중근의 누이동생 안성녀의 아들 권헌과 재혼하였다. 이때 남편이 인쇄소와 정미소를 운영하며 독립군에 군량미를 조달하는 것을 도왔다. 8 · 15광복 후 귀국하여 생활하다가 2006년 부산에서 폐렴으로 사망하였다.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