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훈(李康勳)은 1903년 6월 13일 강원도 김화(金化)에서 태어났다. 1910~1917년 사숙((私塾)에서 한문을 수학하였다.
이강훈은 1919년 3 · 1운동이 일어나자 고향에서 만세 시위에 가담하였다가 체포되어 고초를 겪었다. 1920년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여 1년간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총리실에서 독립 사업을 도왔다. 1921년부터 1924년까지 지린성〔吉林省〕 국자가(局子街)의 북간도연길도립사범학교에서 수학하였다.
1925년 3월 김좌진(金佐鎭)이 창설한 신민부(新民府)에 참여하여 국내와 연락하면서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의 임무를 맡았다가 10월에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어 동료들과 함께 옥고를 치렀다.
1926년 이강훈은 신민부 총사령관 김좌진의 지시로 백두산 북쪽 안도현(安圖縣) 삼인방(三人坊)에서 신창학교(新彰學校)의 교사를 지내며 후진 양성에 힘썼다. 이는 신민부가 추진하던 둔전제(屯田制)를 정착시키는 데 필요한 인적 자원을 기르기 위함이었다. 이후 1932년까지 신민부 산하 각급 학교에서 교무(敎務)를 담당하며 동포 자제들의 민족정신 고취에 주력하였다.
1929년 7월 삼부(참의부 · 정의부 · 신민부) 통합운동 실패 후 혁신의회에 가담하였던 김좌진 · 정신(鄭信) · 민무(閔武) 등 군정파 인사들이 북만주의 대종교 신도들, 농무회(農務會), 자유혁명론자인 소수의 무정부주의 청년들을 규합하여 결성한 한족총연합회(韓族總聯合會)에 참여하였다.
1929년 12월 헤이룽장성〔黑龍江省〕 무단장시(牧丹江市) 해림(海林)에서 북만민립중학기성회(北滿民立中學期成會)를 개최하였다. 이지산(李之山) · 김야운(金野雲) · 김유성(金有聲) · 전명원(全明源) 등과 함께 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고, 이후 민립중학을 설립하여 교포 청소년들의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데 기여하였다.
1930년 이후 일제의 만주 침략이 노골화되자 이강훈은 1932년에 다시 상하이로 건너갔다. 1930년 4월 상하이에서 유자명(柳子明) · 정화암(鄭華岩) · 백정기(白貞基) 등이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在滿朝鮮無政府主義者聯盟)을 전투 체제로 새롭게 개편하여 창립한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이 단체는 무정부주의 독립 단체로서 일본의 폭력과 독재에 저항하는 급진적인 의열투쟁을 추구하였다.
1933년 3월 남화한인청년연맹은 아리요시 아키라〔有吉明〕 주중(駐中) 일본 공사가 아라키 사다오〔荒木貞夫〕 육군 대신의 밀명으로 중국 정객을 매수하여 만주를 포기하게 하는 등 독립운동 방해 공작을 꾸미고 있다는 사실을 탐지하였다. 이때 오면직(吳冕稙) · 원심창(元心昌) · 백정기 · 이달(李達) · 김지강(金芝江) · 유기문(柳基文) · 엄순봉(嚴舜奉) 등과 함께 흑색공포단(黑色恐怖團, B.T.P.)을 조직하고, 백정기와 함께 아리요시 처단 작전을 벌였다.
같은 해 3월 17일 이강훈은 흑색공포단 대원들과 함께 권총과 폭탄, 수류탄 등을 휴대하고 상하이 공동조계의 일본계 고급 요리점인 육삼정(六三亭) 부근에 대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거사가 사전에 노출되는 바람에 일본 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었다. 1933년 11월 나가사키〔長崎〕지방재판소에서 징역 15년 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1945년 8 · 15광복으로 출옥하였다. 백정기는 나가사키형무소에서 옥사하였다.
이강훈은 8 · 15광복 이후 재일한국거류민단 부단장으로 활동하다가 1960년 귀국해 한국사회당 총무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61년 오일륙 군사쿠데타 당시 혁신계 정당 간부로서 3년간 옥고를 치렀다. 1969년 독립운동사 편찬위원, 1977년 독립운동 유공자 공적 심의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88년부터 5년간 광복회 회장을 지냈다.
저서로 『해외독립운동사』, 『민족해방운동과 나』, 『항일독립운동사』, 『독립운동대사전』, 『대한민국임시정부사』, 『마적과 왜적』, 『무장독립운동사』, 『청사에 빛난 선열들』 등을 남겼다.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