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은 이덕(二德) 또는 송일주(宋一舟). 충청남도 출신이다.
1930년 1월 중국 동삼성(東三省) 지역의 영안현(寧安縣)에 근거지를 두고 있던 신민부(新民府)의 국내 공작원으로 활동하였다.
이때 이강훈(李康勳)과 함께 김좌진(金佐鎭)의 비밀지령과 국내의 주요 인사에게 전달할 문서와 소형폭탄·권총 등을 가지고 산시참(山市站)을 출발해 북간도지방으로 갔다. 그러나 이곳에서 김좌진의 암살소식을 듣고 같은 해 10월 신민부의 본부로 귀환하였다.
1930년 정신(鄭信)과 함께 한족총연합회(韓族總聯合會)의 재건과 독립운동세력의 재규합을 위해 활동하다가 박내춘(朴來春)·이백호(李白虎)·김준(金俊)·이익화(李益和) 등 반민족주의자들의 방해공작으로 인해 관내로 이동하게 되었다.
1931년 11월부터 상해(上海)에서 오면직(吳冕稙)·원심창(元心昌)·백정기(白貞基)·이강훈 등과 함께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의 행동단체인 결사대를 조직해 독립운동을 전개시켜 나갔다.
1933년 3월 상해의 백정기 집에서 원심창·오면직·엄순봉(嚴舜奉)·김성수(金聖秀)·정현섭(鄭賢燮)·이수현(李守鉉)·정종화(鄭鍾華)·정치화(鄭致和)·이강훈 등과 함께 무정부주의(無政府主義)를 표방하고, 재중국 일본공사 아리요시[有吉明]를 권총과 폭탄으로 주살하려는 계획에 참가하고 활동하였다.
같은 해 6월 하순 상해에서 정화암·박기성(朴基成) 등과 회합해 남화한인청년연맹의 운동자금 확보를 목적으로 변절한 친일파인 조상섭(趙尙燮)의 집을 급습, 인삼 등 시가 650원 상당의 물품을 조달하였다. 1936년 중국 난징[南京]에서 유자명(柳子明)·정화암 등과 함께 조선혁명자연맹(朝鮮革命者聯盟)의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1938년 10월 한커우[漢口]에서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가 창설되자 입대해 본부 선전조장으로 활동하였다. 1940년 2월 조선의용대 본부의 정치조자료실(政治組資料室) 주임 겸 중국문간행위원회(中國文刊行委員會) 위원을 역임하였다.
1940년 10월 10일 조선의용대 조직 제2주년을 맞이해 기념헌사를 중국 충칭[重慶]에 있는 『중앙일보(中央日報)』에 기고하였다. 1941년 10월 조선의용대원인 섭홍덕(葉鴻德)이 중국에서 항일전에 참가하다가 전사하자 『중앙일보』에 애도문을 발표하였다.
또한, 1942년 3월 1일 「태평양전쟁과 조선혁명」이라는 논문을 『중앙일보』에 발표하였다. 1942년 조선의용대가 광복군 제1지대로 개편될 때 제1지대 비서로 임명되는 등 광복군의 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그러나 이 해 충칭에서 후두암으로 죽었다.
199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