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일제강점기 때, 신민부 국내공작원, 조선의용대 본부 선전조장, 광복군 제1지대 비서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개설
생애 및 활동사항
이때 이강훈(李康勳)과 함께 김좌진(金佐鎭)의 비밀지령과 국내의 주요 인사에게 전달할 문서와 소형폭탄·권총 등을 가지고 산시참(山市站)을 출발해 북간도지방으로 갔다. 그러나 이곳에서 김좌진의 암살소식을 듣고 같은 해 10월 신민부의 본부로 귀환하였다.
1930년 정신(鄭信)과 함께 한족총연합회(韓族總聯合會)의 재건과 독립운동세력의 재규합을 위해 활동하다가 박내춘(朴來春)·이백호(李白虎)·김준(金俊)·이익화(李益和) 등 반민족주의자들의 방해공작으로 인해 관내로 이동하게 되었다.
1931년 11월부터 상해(上海)에서 오면직(吳冕稙)·원심창(元心昌)·백정기(白貞基)·이강훈 등과 함께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의 행동단체인 결사대를 조직해 독립운동을 전개시켜 나갔다.
1933년 3월 상해의 백정기 집에서 원심창·오면직·엄순봉(嚴舜奉)·김성수(金聖秀)·정현섭(鄭賢燮)·이수현(李守鉉)·정종화(鄭鍾華)·정치화(鄭致和)·이강훈 등과 함께 무정부주의(無政府主義)를 표방하고, 재중국 일본공사 아리요시[有吉明]를 권총과 폭탄으로 주살하려는 계획에 참가하고 활동하였다.
같은 해 6월 하순 상해에서 정화암·박기성(朴基成) 등과 회합해 남화한인청년연맹의 운동자금 확보를 목적으로 변절한 친일파인 조상섭(趙尙燮)의 집을 급습, 인삼 등 시가 650원 상당의 물품을 조달하였다. 1936년 중국 난징[南京]에서 유자명(柳子明)·정화암 등과 함께 조선혁명자연맹(朝鮮革命者聯盟)의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1938년 10월 한커우[漢口]에서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가 창설되자 입대해 본부 선전조장으로 활동하였다. 1940년 2월 조선의용대 본부의 정치조자료실(政治組資料室) 주임 겸 중국문간행위원회(中國文刊行委員會) 위원을 역임하였다.
1940년 10월 10일 조선의용대 조직 제2주년을 맞이해 기념헌사를 중국 충칭[重慶]에 있는 『중앙일보(中央日報)』에 기고하였다. 1941년 10월 조선의용대원인 섭홍덕(葉鴻德)이 중국에서 항일전에 참가하다가 전사하자 『중앙일보』에 애도문을 발표하였다.
또한, 1942년 3월 1일 「태평양전쟁과 조선혁명」이라는 논문을 『중앙일보』에 발표하였다. 1942년 조선의용대가 광복군 제1지대로 개편될 때 제1지대 비서로 임명되는 등 광복군의 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그러나 이 해 충칭에서 후두암으로 죽었다.
상훈과 추모
참고문헌
- 『대한민국독립유공인물록』(국가보훈처, 1997)
- 『한민족광복투쟁사』(이현희, 정음문화사, 1990)
- 『이 조국 어디로 갈 것인가』(정화암, 자유문고, 1982)
- 『독립운동사자료집』7(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3·1978)
- 『독립운동사』5·7(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3)
- 「신민부의 약사」(『신민부생존자공동기록』, 1954)
- 「公證書」(中華人民共和國四川省重慶市, 公證處, 1991. 9.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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