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영양 출신으로, 일명은 엄형순(嚴亨淳)이다.
집안이 빈궁하여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던 중 생계유지를 위해 1923년 만주로 건너갔다. 농업노동에 종사하다가 만보산사건(萬寶山事件)이 발발하자 안주할 땅을 찾아 중국땅을 돌아다녔다.
그러던 중 상해(上海)부근 남상(南翔)의 입달학원(立達學院) 교사 유자명(柳子明)을 만나게 되면서 남상에서 5리쯤 떨어진 남당(南塘)에서 농업에 종사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때부터 무정부주의 색채가 짙어지게 되었다.
1932년 12월 상해 프랑스조계내의 복이리로정원방(福履理路亭元芳)에서 백정기(白貞基)·원심창(元心昌) 등을 만나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33년 5월 오면직(吳冕稙)·주열(朱烈)·안경근(安敬根)과 함께 일제 영사관 밀정 이종홍(李鐘洪)을 처단하였다.
그리고 8월 1일 정화암(鄭華巖)과 함께 105인사건에 연루되었던, 자칭 애국자 옥관빈(玉觀彬)이 당시 상해에 와서 일본 관헌과 내통하고 있음을 알고, 그의 사촌형인 옥성빈(玉成彬)의 집을 찾아 가는 것을 권총으로 처단하였다.
1934년 3월 초순, 당시 아리요시[有吉明] 공사가 무정부주의자들을 탄압하고, 또한 장개석(蔣介石)을 4,000만원으로 매수하여 만주를 포기하게 하고 열하에서 저항하지 못하도록 하려고 하자, 그를 살해할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공사가 일본으로 이 문제를 협의하러 출발하기 전에, 3월 17일 당시 일본인이 경영하던 고급음식점에서 송별회를 연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그래서 백정기·이강훈·원심창 등 3명으로 하여금 부근의 중국집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살해하도록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어 1935년 3월 25일 이규호(李圭虎)와 함께 정화암·이달(李達)·전이방(田理芳) 등과 협의하여 상해조선인거류민회 부회장인 이용로(李容魯, 일명 李榮魯)가 일본총영사와 내통함을 알고 집으로 찾아가 처단하였다. 거사 직후 붙잡혀 1936년 3월에 사형언도를 받았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