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는 구파(鷗波). 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 부안군 부안읍 신운리 출신이다.
1919년 서울에 올라와 3 · 1운동을 목격하고, 고향에 돌아가 동지를 규합해 일제와의 무장항쟁을 전개하였다. 같은 해 8월 인천에 있는 일본군 시설물을 파괴하려다가 사전에 폭로되어 만주 봉천(奉天)으로 망명하였다.
독립운동의 군자금 조달을 위해 여러 차례 국내에 잠입해 활동하다가 1920년 서울 중부경찰서에 구속되기도 하였다. 그 뒤 주로 북경(北京)을 중심으로 이회영(李會榮) · 유자명(柳子明) · 이을규(李乙奎) · 정화암(鄭華巖) · 신채호(申采浩) 등과 자주 접촉하며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이 때 이회영 · 신채호의 영향으로 무정부주의에 빠져들게 되었다. 그리하여 1923년 9월 중국 후난성[湖南省] 둥팅호[洞庭湖] 근처에 무정부주의가 추구하는 이상적인 농촌사회 건설에 참여하였다. 1924년 여름, 일본 동경에 잠입해 수력공사장 · 주요건물 등을 폭파하기로 했으나 여의치 못해 북경으로 귀환하였다.
1924년 9월 일본관헌의 탄압을 피해 상해(上海)로 가서 정화암 등과 함께 영국인이 경영하는 철공장에 들어가 폭탄제조기술을 익히면서 노동문제에 관한 이해가 깊어졌다. 1925년 상해에서 5 · 30 총파업이 일어나자 중국인 무정부주의자들과 더불어 노동자운동을 전개해 10여만 명 단위의 대노동자조합을 만들어 독립운동의 방편으로 이용할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
1927년 푸젠성[福建省] 취안저우[泉州]에서 민단편련처(民團編練處)를 조직해 농촌의 자치조직을 통해 무정부주의운동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노력하였다. 1928년 5월 초에는 일본상품 배격운동을 지도했고, 5월 말에는 아시아 각국의 무정부주의자들이 모여 결성한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東方無政府主義者聯盟)에 한국대표로 참석하였다. 1930년 북만주로 가서 북만주에 있는 한국무정부주의자연맹의 동지들과 자유혁명자연맹(自由革命者聯盟)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민중훈련에 힘썼다.
1931년 9월 한국 · 중국 · 일본의 무정부주의자들이 모여 항일구국연맹을 결성하고, 11월에 적의 국경기관 및 수송기관의 파괴 · 요인 사살 · 친일파 숙청 등을 목표로 ‘비티피(BTP)’라는 흑색공포단(黑色恐怖團)을 조직해 배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무렵 상해에는 각지에서 무정부주의자들이 모여들고 있었는데, 이회영 · 정화암과 함께 이들을 규합,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을 결성하였다.
1933년 일본주중대사인 아리요시[有吉明]가 상해 훙커우[虹口]에 있는 일본요정 육삼정(六三亭)에서 일본정객 참모부원들을 위시한 친일중국정객과 군인 100여 명을 초대해 연회를 연다는 소식을 듣고, 아나키스트 이강훈(李康勳) · 원심창(元心昌)과 함께 습격하려다 잡혀 일본 나가사키법원[長崎法院]에서 무기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지병으로 죽었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