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영신(沈永信)은 1882년 7월 20일 황해도 송화군(松禾郡)에서 태어났다. 개신교 신자이다. 남편을 여의고 34살 때인 1916년 어린 아들을 데리고 사탕수수 농장 노동자인 조칠문과 사진결혼하여 하와이로 이주하였다.
1913년 4월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황마리아 등과 함께 대한인부인회(大韓人婦人會)라는 여성운동 단체를 조직하고 위원을 맡아 활동하였다. 이 단체는 자녀의 국어교육 장려, 일제 물품의 사용 배척, 교회와 사회단체 후원, 재난 동포 구제 등을 중요 사업으로 삼았다. 이 단체는 1914년 5월 노블(William A. Noble) 선교사를 통해 서간도에 구제 자금을 보낸 것을 시작으로 약 5년간 국내외의 재난 동포 구제 사업을 벌였다.
국내에서 3 · 1운동이 일어나자 1919년 3월 15일 하와이 각지의 한인 여성 대표자 41명이 호놀룰루에 모여 ‘부녀공동대회’를 열고 조국의 독립운동을 후원하기로 결의하였다. 3월 29일 열린 제2차 대회에서 독립운동 후원금 모집, 항일 전쟁 출정군인 구호 사업 준비, 재난 동포 구제를 목적으로 하는 대한부인구제회(大韓婦人救濟會) 결성의 결의안이 통과되었다. 이때 심영신은 손마리아, 황마리아 등과 함께 각 지방 대표로서 대한부인구제회의 결성에 앞장섰다.
1920년대 말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 김구(金九)로부터 재정 부족을 호소하는 편지를 받자 하와이의 동포들에게 이런 사실을 알리고 자금 모집에 나서는 한편, 직접 중국 상하이로 독립 자금을 보내기도 하였다.
1935년 6월에 대한부인구제회 법무 담당을 맡았고, 1936년 4월 대한부인구제회 중앙부 행정위원 교체 때 부회장에 올랐고, 1940년 6월 대한부인구제회 중앙부장으로서 민족 진영의 대표 당으로서 김구를 중앙집행위원장으로 하는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이 창당되자 이를 축하하는 글을 보냈다.
1940년 5월 루스벨트(Franklin D. Roosevelt) 대통령이 국방력 건설과 전쟁 난민을 위한 적십자 구제금 기부를 미국민에게 요청하자 하와이 한인 사회에서 미국 국방을 후원해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되었다. 10월 대한인동지회 등 6개 단체 대표 24인이 모여 연합한인위원회를 결성하였다. 이때 국민회 측 대한부인구제회 대표로서 연합한인위원회 구호부 부의장을 맡아 활동하였다.
1941년 4월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개최된 해외한족대회(海外韓族大會)에 동지회 측 대한부인구제회 대표인 민함나와 함께 국민회 측 대한부인구제회 대표로 참석하였다. 이 대회에서 조직된 재미 한인 사회의 통일 기관인 재미한족연합위원회(在美韓族聯合委員會)에서 강상호 · 민함나와 함께 의사부 위원으로 활동하며 대한민국임시정부 후원과 대미 외교 및 선전 사업을 통해 독립운동에 봉사하였다.
1997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