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부친 이회영을 따라 중국 베이징으로 이주하였고, 1929년 다시 부친을 따라 상하이로 건너갔다. 같은 해 11월 상하이에서 화랑청년단(花郞靑年團)에 가입하였다. 1930년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에 참여하였다. 이 단체는 1930년 4월 상하이에서 재중 한인 무정부주의자들이 조직한 단체로서, 일본의 폭력과 독재에 저항하는 급진적인 의열투쟁을 추구하였다. 이때 백정기(白貞基) · 정화암(鄭華岩) · 오면직(吳冕稙) · 엄형순(嚴亨淳, 嚴舜奉) · 원심창(元心昌) · 이강훈(李康勳) 등과 함께 활약하였다. 아울러 이 단체의 기관지인 『남화통신(南華通信)』에 기고하는 한편, 출판 작업을 도왔다.
1932년 11월 독립운동 근거지를 마련하고 일본군 사령관 등을 암살할 목적으로 만주로 가던 중 다롄〔大連〕에서 일경에 체포된 이회영이 여순감옥(旅順監獄)에서 모진 고문 끝에 순국하자 대일 항쟁의 전면에 나섰다. 이후 이회영의 만주행을 밀고한 연충열과 이규서를 비롯하여 친일 인사 7명을 처단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33년 3월 오면직 · 원심창 · 백정기 · 이달(李達) · 김지강(金芝江) · 유기문(柳基文) · 엄순봉 등과 함께 남화한인청년연맹의 행동 단체인 흑색공포단(黑色恐怖團: B.T.P.)을 조직하여 일제 요인 및 친일파 암살 및 군자금 모금 활동을 벌였다. 3월 17일 한국 독립운동 방해 공작을 펼치던 주중(駐中) 일본 공사 아리요시 아키라〔有吉明〕를 상하이 공동 조계(租界)의 일본계 고급 요리점에서 암살하려던 육삼정(六三亭) 의거에 가담하였이다. 그러나 이 의거 계획은 사전에 누설되어 실패로 끝났고 백정기 · 이강훈 · 원심창 등은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1935년 1월 엄순봉 · 이달 · 정화암 · 김지강 등과 함께 친일 조선인 조상섭(趙尙燮)의 집을 습격하여 독립자금을 마련하려 하였다. 엄순봉 · 이달 · 김지강 등을 조상섭의 집으로 안내하여, 이들이 조상섭의 부인을 위협하여 금품을 탈취하게 하였다.
같은 해 3월에는 정화암과 협의한 후 엄형순과 함께 상하이 조선인거류민회(朝鮮人居留民會) 부회장과 고문을 역임한 친일파 이용로(李容魯)를 암살하는 데 성공하였으나, 사실이 발각되어 도피 중 중국 경찰에 체포된 후 상하이 일본 영사관에 인도되어 한국으로 압송되었다.
1936년 4월 경성복심법원에서 13년 형을 선고받고 옥살이를 하였으며, 이때 엄순봉은 사형선고를 받았다. 1939년 8월 마포형무소에서 항일 선전문을 제작하여 배포하였다가 가중처벌을 받았다. 광주형무소로 이감되었다가 1945년 8 · 15광복으로 출옥하였다.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수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