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찬희(柳纘熙)는 1884년 8월 8일 황해도 금천군 합탄면 후매리 대동에서 유헌보(柳憲甫)의 6자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고 1900년 배재학당에 입학하여 근대학문을 이수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과 1907년 고종 황제의 강제 퇴위를 보고 국권 수호를 위해서는 인재 양성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1909년경 서북학회 금천지회에 가입하여 학사시찰위원을 맡아 교육을 통한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1년부터 1913년까지 강원도 이천군에서 감리교 신자로서 포교 활동을 벌이며 청년들의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1913년경 두만강을 건너 북간도 옌지현〔延吉縣〕 국자가(局子街)에 도착하여 권사용(權思容)이 설립한 태광학교(太光學校)에서 1915년 1월까지 교사로 활동하였다.
1913년 옌지현에서 김약연 · 정재면 · 김립 등이 간민회(墾民會)를 조직하자 여기에 참여하여 동포들의 식산흥업과 국적 취득 등을 옹호하고, 교육과 언론 진흥 활동을 벌였다. 1910년 8월 29일 국치일(國恥日)에 권사용 등 30여 명과 함께 국자가의 기독교회에 모여 기념식을 거행하였다. 이 자리에서 고국을 잊을 수 없다는 취지의 애국 연설을 하였다.
1916년경부터 무악흥업회사라는 무역회사를 운영하여 재산을 모았다. 또한, 1910년대 중후반 장로교 목사인 베이커 부부가 재건한 태광학교 교장으로 활동하면서 한인 자제들의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1919년 2월 초 김약연 · 조극 · 김신근 · 김영학 · 박경철 등과 함께 회의를 개최하고, 종교계 대표자 정재면, 교육계 대표자 김약연, 사회계 대표자 이중집을 2월 12일 프랑스 파리에 파견하기로 하였다. 이때 비용은 유찬희와 김신근이 마련하였다.
1919년 3 · 1운동이 일어나자 3월 12일 독립선언서를 배포하였다. 3월 13일 정오에 중국 용정(龍井)에서 국자가 · 화룡 · 용정 등지에서 모인 군중 1,300여 명을 이끌고 ‘한국독립(韓國獨立)’과 ‘정의인도(正義人道)’라고 쓴 큰 깃발과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 운동을 벌였다. 같은 해 3월 중순경 구춘선 · 마진 · 김영학 · 박동원 등과 대한독립기성총회(大韓獨立期成總會)를 조직하고 재무부장을 맡아 활동하였다. 대한독립기성총회가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로 발전하자 여기에 참여하여 옌지현과 왕칭현〔汪淸縣〕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1919년 3~4월 국내외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김영학 · 박동원 등과 함께 연해주로 가서 대한국민의회에 참여하였다. 1919년 연해주 우수리스크에서 합자회사인 대동상무회사를 설립하고 운영하다가 1920년 1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김치보 등과 블라디보스토크 상무총회를 설립하고 부의장으로 활동하였다.
1920년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주외재무관서의 아령 부재무관에 선임되어 임시정부를 위한 독립자금을 모집하였다. 6월경에는 대한국민회 총기 구입 의원으로 연해주에서 총기를 구입하였다. 1920년 8월 엔지현에서 대한국민회 참모장으로 활동하였고, 12월에는 대한국민회 재무부장으로 선출되어 독립자금을 지원하였다. 1920년 6월의 봉오동전투와 10월의 청산리전투 당시 독립군을 재정적으로 지원하였다.
1920년 10월 일본이 간도로 출병하자 독립군과 함께 북만주로 이동하였다. 1921년 12월경 둔화현〔敦化縣〕에서 구춘선 · 마진 등과 상하이파 고려공산당의 둔화현 중앙총회를 조직하고 참사를 맡았다. 이때 고려혁명군을 조직하여 소비에트러시아와 연계하여 대일항전을 전개하려고 하였다. 1923년 12월 둔화현에서 수전(水田)을 개발하고 조선의 독립을 위한 항일사상을 고취하는 동성노농공사(東省老農公司)의 간사로 활동하였다.
1923년 1월 중국 상하이에서 국민대표회의가 개조파와 창조파로 분열되자 창조파를 지지하였다. 1923년 중반 국민대표회의 분열 후 베이징에서 창조파가 국민위원회와 국무위원회를 조직하였을 때 국민위원회의 국민위원에 선임되었다. 1924년 2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제1회 국민위원회가 개최되자 여기에서 소비에트러시아의 지원을 받아 새로운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무장투쟁을 전개하는 것에 대해 협의하였다.
1924년 이후 우수리스크에서 남감리교회 목사로 선교 활동을 벌이면서 동포들의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1926년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3 · 1운동 8주년 기념 강연회를 개최하고 일제를 비판하였다. 1930년 위암에 걸려 귀국한 후 서울 세브란스병원에서 치료 중 사망하였다.
201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