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하 북간도 용정(龍井)의 명동학교를 중심으로 민족교육에 힘쓴 독립운동가이자 교육가이다.
1884년 평안남도 숙천에서 출생하였다. 본명은 정병태(鄭秉泰), 호는 벽거(碧居) · 일광(一光) · 우산(雨山)이다. 아버지는 정학전, 어머니는 김성약(金聖約)이다. 어머니는 1883년 만주에서 입국한 서상륜(徐相崙)의 전도로 신앙을 갖게 된 초창기 개신교인이다.
1898년 순안 측량학교를 마치고 1907년 서울 상동교회 부설 상동청년학원을 졸업하였다. 졸업 후 상동교회를 거점으로 결성된 비밀결사 신민회에 가입하고 신민회에서 세운 평양 대성학교와 원산 보광(普光)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였다. 이동휘의 권유로 ‘북간도교육단’을 조직하여 간도에서 새로운 교육사업을 모색하는 중, 1909년 용정의 명동(明東)학교 교사로 초빙되었다. 교무주임으로 활동하면서 중학부와 여학부를 설치하는 등 학교발전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1925년부터 2년간 중국의 남경 금릉(金陵)대학 신학부에서 공부하였으며, 평양신학교에서 1년간 더 공부한 뒤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28년부터 용정 은진중학교 교목으로 활동하다가, 1930년부터는 함경북도 청진과 원산에서 종교 활동을 통한 민족운동에 매진하였다.
광복 후 독립촉성기독교 중앙협의회에 참여하고 『기독공보』 사장으로 활동했다. 말년에는 중앙교회에서 목회자로서 활동하다가 1962년 서울에서 별세하였다
1909년 명동학교 교사로 초빙되었을 때, 교장 김약연(金躍淵)을 기독교인으로 만들고 성경과 예배를 정규과목으로 채택하는 등 명동학교를 기독교와 민족의식이 연결된 근대교육기관으로 만드는 데 기여했다. 명동학교에 중학교 과정을 설치할 때는 역사학자 황의돈(黃義敦), 한글학자 장지영(張志暎), 박태환(朴兌桓) 등과 같은 우수한 교사를 초빙하였으며, 여학부를 설치할 때도 이의순(李義橓), 우봉운(禹鳳雲) 등을 교사로 초빙해 북간도 최초의 근대적 여성 교육기관으로 만들었다.
1910년 간민교육회(墾民敎育會) 총무로 활동하면서 문맹퇴치와 식산흥업(殖産興業) 운동을 전개하며 신문화의 보급에 앞장섰다. 1912년에는 간민교육회를 간민회(墾民會)로 발전시켜 간도를 항일민족운동의 전초 기지로 만들려고 하였다. 1919년 2월 연해주에서 열린 전로한족회중앙총회(全露韓族會中央總會)에 김약연 등과 함께 북간도 대표로 참여하였고, 3월에는 조선독립기성총회(朝鮮獨立期成總會)에 명동촌 대표로 참여하여 의사부원(議事部員)으로 선출되었다. 1919년 9월에는 임시정부 내무부 북간도 특파원으로 임명되었으며, 1920년 1월에는 상하이에서 열린 중한노공동맹연합회(中韓勞工同盟聯合會)에 기독교계 대표로 참석하는 등 해외에서 민족교육 및 구국운동에 힘썼다. 1962년에 별세하였다.
1963년 대통령 표창을 받았고,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