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기독교 신앙의 확산과 여성의 복지를 위해 노력한 전도부인이다.
1865년 평안남도에서 출생하였다. 16세에 혼인하였으나, 남편과 사별한 뒤 1888년 김종겸(金宗謙)과 재혼하였다. 1896년 미감리회 선교사 노블(W. A. Noble) 목사에게 세례를 받고 세지(世智, Sadie)라는 이름을 얻었다. 1899년 미감리회 여선교회 소속 전도부인(Bible woman)으로 채용되어 본격적인 전도활동을 시작하였다.
1903년 평양 남산현교회에서 보호여회(保護女會, Ladies Aid Society)를 조직하였고, 1916년에는 과부회(寡婦會, Widows Relief Association)를 창설하였다. 1919년 11월 장로교와 감리교 여성들이 조직한 대한애국부인회에 참여하여 재무부 부부장 직책을 맡았다. 1920년 일제 경찰에 의해 대한애국부인회 조직이 발각되면서 체포되었으나 불기소 처분을 받아 석방되었다.
1921년 석방 후 보호여회를 재건하여 70명의 회원을 확보하였으며, 보호여회 기금으로 1923년 평양 칠성문 밖에 교회를 세웠다. 1925년 전도부인직에서 은퇴하였으며 광복 후 월남하였다. 말년에는 사위 변홍규 목사의 집에 기거하다 별세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선교사 보고에 의하면 전도부인으로 활동할 때 매년 2천회 이상 가정심방을 하고, 매월 2회 이상 상가 집을 찾아가 시신의 몸을 닦아주는 염(殮)을 하였다고 한다. 보호여회의 회장으로 활동할 때는 전도와 선교만이 아니라 여성의 능력계발과 구제활동에도 힘썼다. 보호여회 회원들은 월 회비 10전씩을 거두어 전도와 구제비로 사용하였는데, 1911년부터 평양 신양리에 전도부인 한 명을 파송하였고, 1916년에는 만주에 선교사 한 명을 파송하였다.
그가 주도한 과부회는 교회 안의 과부들을 구제하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과부들의 자립을 위한 활동에도 힘썼다. 대한애국부인회 재무부 부부장으로 활동할 당시 군자금 모금의 실질적 책임을 담당하였는데, 일제에 발각될 때까지 2,400여 원의 자금을 마련하여 임시정부로 보냈다고 한다.
1922년 평양 남산현교회에서 ‘김세지 전도부인 성역 25주년 기념식’이 거행되었고, 1933년 제3회 감리교 종교교육대회에서 종교교육 공로자 표창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