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말 일본인 노리마츠 마사야스[乘松雅休]의 포교활동에 의해 시작된 신앙공동체로서 제도교회와는 매우 다른 신앙노선을 보여주었으나 최근에는 기성교회와의 차이가 점차 사라지고 있다.
기존의 기독교 교회들이 순수한 신앙에서 벗어났다고 보고 성서에 근거한 순수 신앙의 회복을 목표로 설립되었다.
1896년 일본인 노리마츠 마사야스가 내한하여 포교활동을 시작하였다. 노리마츠는 일본에서 포교활동을 하던 영국인 브랜드(H. G. Brand)를 통해 플리머드 형제단(Plymouth Brethren)의 신앙을 접하고, 한국인을 대상으로 한 포교를 결심하였다고 한다.
처음에는 서울을 중심으로 포교활동을 하였으나, 1898년 브랜드 부부가 내한하여 전도활동에 합류하자 수원 지역으로 내려와 포교활동을 하였다. 1900년 장안동 자택에 성서강론소(聖書講論所)를 차리면서 포교활동을 본격화했고, 1909년에는 신도들의 지원을 받아 수원 천변에 한옥으로 건축된 ‘수원 성서강당’을 세웠다. 1917년 노리마츠가 일본에서 ‘기독동신회’라는 이름으로 관청에 종교단체 등록을 한 뒤, 한국에서도 같은 명칭을 사용했다. 1919년 당시 교회의 수는 38개였다.
1921년 노리마츠가 고향 오다와라[小田原]에서 숨을 거두자 신자들이 그의 유언에 따라 유해를 가져와 수원 동신교회 뜰에 묻고 기념비를 세웠다. 노리마츠의 사후 김태희(金太熙)가 『복음신보』를 발간하고 「만인의 활로」 등과 같은 전도 소책자를 출판하는 등 활발한 포교활동을 하였으나 교세는 점차 약화되었다.
광복 이후 전국 각지에서 모임이 활성화되면서 교세가 증가하였지만 교인들 사이에 교리논쟁이 일어나 분열의 조짐을 보였다. 교세가 가장 큰 지역은 서울과 수원으로, 서울 지역의 모임은 1977년 ‘기독동신회 서울중앙교회’라는 이름을 내걸었고, 수원 지역의 모임은 1979년 ‘수원동신교회’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일주일 단위의 정기 예배를 드리고 있으며 예배 형태와 분위기는 기성교회와 비슷하다. 성찬식이 좀 더 중시되고 설교보다 증언과 간증이 강조되는 점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각 지역별로 신앙 모임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전국 단위의 대회도 개최된다. 매년 여름 수련회를 통해 전국의 교인들이 모이는 한편, 임원들로 이루어진 임원회의가 정기적으로 열리고 있다. 임원에 해당되는 인물들은 이미 ‘목사’라는 호칭을 지니고 있으며 ‘장로’ 직분의 도입도 고려하고 있다.
19세기 말 일본인에 의해 포교되었지만 일제의 식민정책이나 문화 침략과는 거리를 두고 한국인에게 기독교 신앙을 전하려고 했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