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하 기독교 민족운동의 일환으로 절제운동과 교육운동에 종사한 대표적인 개신교 여성운동가이자 교육가이다.
1885년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본명은 이정규(李貞圭), 세례명은 메리(Mary)이다. 17세에 상동교회 교인 손봉순(孫奉順)과 혼인하고, 1906년 스크랜턴(W. B. Scranton)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세례명 메리(Mary)와 남편의 성을 취해 ‘손메리’로 불렸고, ‘손몌례’로 표기하였다. 남편의 주선으로 진명(進明)여학교에 입학하였으며, 졸업 후 감리교 여자 신학당(Bible Woman’s Training School)에 입학했다. 1912년 졸업과 동시에 상동교회 전도부인으로 파송되어 전도활동에 주력하는 한편, 1915년부터 이화학당에서 성경과 가사를 가르치기도 하였다.
1924년 조선여자기독교절제회 총무로 취임하였으며, 1927년에는 근우회에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일제 말에는 대성학원과 흥아가정여학원 원장을 역임하였으며, 광복 후 경성여자고등기술학교를 설립했고, 1949년에는 정명여자중학교를 세웠다. 1952년 정명여자중학교 재산을 개신교 재단인 유하(有廈)학원에 기증하였고, 그 재단에서 세운 서울예술중고등학교의 명예교장과 이화학원 명예이사로 추대 되었다. 1963년에 별세하였다.
1923년 세계기독교여자절제회의 파송을 받고 내한한 틴링(C. I. Tinling)과 함께 전국 각지를 순회하며 금주·금연의 필요성을 호소하는 강연을 하였다. 강연을 하면서 회원 모집과 조직 결성에 힘쓴 결과 1923년 말 1,508명의 회원이 확보되었고, 16개 지방에 절제회가 조직되었다. 1924년 8월 이화학당에서 선교사 조직과 별도로 한국인 교회 여성들로만 이루어진 조선여자기독교절제회가 창립되었을 때 실무를 책임지는 총무를 맡았다.
금주에 대해 강연할 때에는 술의 독함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는 방법을 사용하는가 하면, 총독부에 들어가는 엄청난 규모의 주세(酒稅)를 언급하면서 민족의식을 일깨우기도 했다.『기독신보』(1930.4.30.)에 기고한 「조선의 금주운동」이라는 글에서는 술을 “탄환 없는 대포”에 비유하고, 금주운동을 “육을 살리고 영을 살리는 운동이며 죽어가는 조선을 살리는 운동”이라고 설파했다. 근우회 사건과 관련하여 1929년 총무직을 사임한 뒤 교육계에 종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