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신도 ()

개신교
인물
일제강점기 때, 평양 대한애국부인회 총재로 활동하며 상해 임시정부를 지원한 개신교인 · 독립운동가.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여성
출생 연도
1860년(철종 11)
사망 연도
1933년
본관
해주(海州)
출생지
평안남도 강서
관련 사건
대한애국부인회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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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일제강점기 때, 평양 대한애국부인회 총재로 활동하며 상해 임시정부를 지원한 개신교인 · 독립운동가.
개설

일제하 평양의 대한애국부인회 총재직을 맡아 대한민국임시정부 후원, 군자금 모집, 배일사상 고취 등을 전개한 개신교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생애

1860년 평안남도 강서에서 출생하였다. 독립운동가 손정도(孫貞道, 1882~1931)의 모친이다. 성년이 된 후 평안남도 유생 손형준(孫亨俊)과 혼인하고, 네 아들을 낳았다. 맏아들 손정도의 영향으로 기독교 신앙에 입문하고, 1909년 미감리회 여선교회 소속 유급 전도부인이 되었다. 1912년 일제가 조작한 ‘가츠라[桂太郞]암살음모사건’에 손정도가 연루되어 체포되면서 전도부인직을 사임하였다.

1919년 평양 대한애국부인회 총재로 추대되어 활동하였으나, 1920년 일제에 의해 조직이 발각되어 1년간 평양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출옥 후 중국 길림으로 망명하여 손정도가 맡고 있던 길림한인교회를 도우며 지냈다. 1931년 손정도의 죽음을 계기로 귀국한 뒤, 1933년 평안남도 강서 고향집에서 73세에 타계하였다.

활동사항

전도부인 시절에는 선교사 루퍼스(M. Rufus) 부부, 로빈스(H. P. Robbins) 부부, 노블(W. A. Noble) 부인 등과 함께 주로 평양·강서·진남포·증산·봉산 등지에서 활발한 전도활동을 하였다. 전도부인직을 사임한 이후에는 조용히 신앙생활을 하다가 3·1운동 직후 독립운동에 깊이 관여하였다. 이는 평양 지역의 장로교와 감리교 여성들이 상해 임시정부를 후원하기 위하여 창설한 대한애국부인회가 그를 총재로 추대했기 때문이다. 총재로 추대된 배경에는 아들 손정도가 당시 상해 임시정부 의정원 원장으로 있었던 사실이 주요한 변수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총재직을 수락한 이후에는 평남 일대를 돌아다니며 조직을 확대하고 군자금을 모았다.

체포 당시 일제 경찰이 파악한 바에 의하면 평양·진남포·강서·함종·증산 등지에 대한애국부인회의 7개 지회가 있었고, 회원은 모두 100명이었다. 체포 직전까지 1년간 모금한 액수는 2,400여 원에 달했으며, 지원금을 김정목·김순일·김경희 등을 통해 상해 임시정부로 보냈다.

상훈과 추모

2006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한국교회 처음 여성들』(이덕주, 홍성사, 2007)
『한국 기독교 여성운동의 역사』(윤정란, 국학자료원, 2003)
『한국 감리교 인물사전』기독교대한감리회 역사위원회 엮음, 기독교대한감리회, 2002)
『한국감리교여성사』(장병욱, 성광문화사,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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