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에서는 고려시대 이래로 소나무가 가장 쓸모있는 나무로 취급되었고 백목(百木)의 왕으로 인정되어 왔다. 그것은 소나무의 재목으로서의 뛰어난 특성에도 있었지만 풍치적 가치가 높게 평가된 데도 이유가 있다.
이러한 이유로 소나무숲에 대한 금양(禁養:벌목금지제도)은 일찍부터 엄격하였고 아울러 소나무의 재식(栽植)이 권장되었다. 소나무의 용도 중 중요한 것은 황장목(黃腸木)과 같은 관곽재(棺槨材), 병선 등을 만드는 조선재, 건축재, 연료재, 그리고 송피(松皮)·송진 등 부산물 이용이다.
우리 나라에서 소나무에 대한 기록은 오래되었다. 신라의 화랑도들이 소나무를 심었고,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는 1013년(현종 4)에 “성내(城內)의 송백남벌을 금함과 아울러 공용(公用)에 쓸 것 이외에는 시기에 어긋나서 벌송(伐松)함을 일체 금지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조선시대에는 금산(禁山)과 봉산(封山)의 제도가 있어서 소나무숲의 벌목금지가 엄하게 다스려졌다. 태조는 즉위하던 해에 고려조 종묘의 소나무를 베지 말 것을 명했다는 기록(上曰且勿伐前朝宗廟松木)이 있듯이 종묘의 소나무 벌채를 금하였고, 1398년(태조 7)에는 경복궁 왼쪽 언덕의 소나무가 말라죽자 부근의 민가를 다른 곳으로 옮겼는가 하면 송충이가 종묘의 솔잎을 먹자 사람을 동원해서 그것을 잡게 하기도 하였다.
1407년(태종 7)에는 각도의 수령들에게 소나무를 심을 것과 벌목금지를 명하고 있다. 1422년(세종 4)에는 금산의 소나무를 베는 사람이 많다면서 이에 대한 처벌방침을 강구하고 있음이 기록에 보인다.
또, 1424년에는 “도성내외(都城內外) 금산에 무식한 승려들이 집을 지어 사람들이 모이고 소나무를 베어 금산이 황폐되고 있사오니 그 집을 철거하고자 합니다.”라고 한성부가 상계(上啓)하여 승인을 받은 기록도 보인다.
소나무는 꼬불꼬불한 것이라도 그 작벌을 허가하지 않고 있다. 1439년에도 의정부가 상계하기를 “소나무의 금양을 위해서 성(城)으로부터 10리 이내의 숲은 한성부에서 맡아 통행을 금지하기로 하고, 그 밖은 수령이 맡아 엄하게 금단하기로 하고 관찰사를 보내 그들이 직무를 잘 수행하고 있는지의 여부를 조사하여야 합니다.”라고 하였는데 세종이 이를 허락하였다.
1461년(세조 7)에는 금송에 관한 상벌을 상세하게 규정하였다. 그 내용을 보면 엄벌주의로 임하고 있다. 즉, 1, 2그루를 벤 자는 곤장 100대, 산지기는 곤장 80대, 해당 관리는 매[笞] 40대, 3, 4그루를 벤 자는 곤장 100대에 군인으로 보내고 산지기는 곤장 100대, 관리는 곤장 80대, 10그루 이상 벤 자는 곤장 100대에 전가족을 변방으로 쫓아보냈다.
그리고 산지기는 곤장 100대에 군인으로 보내고 관리는 곤장 100대에 파면시켰다. 10년 동안 나무 한 그루 벤 사실이 없을 때에는 그 산지기는 상을 주어 산관직(散官職)으로 승진시킨다.
이러한 형벌은 지금에 있어서도 대단히 가혹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엄한 것이다. 1469년(예종 1)에는 ≪사산송목금벌사목 四山松木禁伐事目≫이 재가되었는데 이것 역시 소나무를 벌채한 자, 또 그것을 감독하지 못한 산직(山直), 사산의 감역관(監役官), 병조·한성부(漢城府)의 해당관리에 대한 벌칙이 엄하게 규정되어 있다.
1548년(명종 3)에는 ≪사산송목금벌사목≫ 같은 벌칙이 있는데도 법규를 겁내지 않고 소나무를 벤 자가 있기 때문에 더욱 그 감독·보호를 철저히 한다는 대책을 세웠다.
이와 같이 사산 뿐만 아니라 전국의 송림이 금양되는 곳이 지정되곤 하였다. 그러나 관기의 해이와 백성들의 자행에 의해서 송금의 실적을 올리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고 실제로 송림은 계속 황폐해졌다.
그러나 지난날 이와 같이 송금에 관한 정책을 세워서 그 대책을 강구하고 부심하였다는 사실은 세계 임업사에도 크게 기록되어야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