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에게 아름다운 풍치를 주어 마음을 즐겁게 하고, 더운 여름에는 그늘을 주어 시원하게 하며, 자동차 내왕이 많은 도로에서는 소음을 줄이고 대기오염물질을 감소시키는 효과가 있으며, 곳에 따라서는 시계를 막아주는 효과도 있다.
인류의 문명이 발달함에 따라 도시를 형성하게 되었고, 도시와 도시 사이를 연결하는 도로는 중요한 기능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도로변에는 나무를 심어 미관을 조성하는 동시에 도로를 보호하게 되었다. 지난날에는 이정표를 나타내는 나무를 심기도 했는데 그것을 후수(堠樹)라고 했다.
『경국대전』 공전에는 도성 내의 도로의 너비를 규정하고, 지방도로에는 10리 거리마다 소후(小堠), 30리 거리마다 대후(大堠)를 세운다고 했는데, 후에는 나무를 심기도 했다. 1405년(태종 5)에는 서울의 가로변에 모두 나무를 심도록 했다.
1441년(세종 23)에는 새로 만든 자[尺]로써 각 역로(驛路)의 거리를 측정하고 30리마다 표를 세우거나 토석을 모아 후를 만들고 나무를 심어 거리를 식별하도록 했다.
1453년(단종 1)에는 “주나라의 제도를 보면 길가에 나무를 줄로 심는다는 기록이 있고, 지난날 이를 본받아 서울 근방의 도로변에 나무를 많이 심었으나, 근래에 와서는 나무를 심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잘라버리는 일도 있고 해서 내년 봄부터는 서울 교외 도로의 양편에 땅의 성질을 감안해서 소나무·배나무·밤나무·회나무·버드나무 등 알맞은 것을 심도록 하고 그 보호를 철저히 하라.”는 명이 내려졌다.
이처럼 가로에 나무를 심은 것은 겨울에 눈이 쌓였을 때는 도로의 방향을 가리키고, 더운 여름에는 가로수 밑에서 쉬는 등 풍치·위생·보안의 효과를 노렸던 것으로 해석된다.
경기도 수원 북문, 즉 장안문에서 북쪽으로 향한 도로 양변의 능수버들·왕버들·소나무의 가로수가 유명한데, 지금도 오래된 소나무의 일부가 남아 있다. 이 길은 정조가 화산의 현륭원(顯隆園)에 참배하는 연도(輦道)로서, 길가에 나무를 심게 하고 보호·관리시켰던 것이라고 한다.
일제강점기의 서울에는 가죽나무가 많이 심어졌고, 그 뒤에는 플라타너스·버드나무·포플러·은행나무 등이 심어졌다. 포플러 종류는 그 뒤 줄어들었고 공해에 강한 수종이 요구되었다.
지방도시에는 기후에 따라 히말라야시더·메타세쿼이아·중국단풍·목백일홍·플라타너스·은행나무·해송·벚나무류·야자류·버드나무류가 심어지고 있다.
제주도는 상록활엽수가 알맞은 곳이다. 우리나라의 가로수용 나무는 대체로 겨울에 잎이 떨어져서 길바닥에 광선을 투사시키고 여름에는 녹음을 주는 수종이 알맞다. 길의 너비가 넓으면 몸집이 큰 나무를 심고, 그렇지 않으면 가지를 다듬어 크기를 조절해 주고 있다.